책 소개
이 책은 그동안 간디주의 하의 역사적 시각에 가려져 왔던 ‘바가트 싱’이라는 인물을 국내에 처음 소개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자칫 인도 역사를 생소하게 느낄 수 있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사진 자료들을 다수 수록하고 참고자료를 포함해 읽을거리를 추가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의 역사적 시각을 한층 넓힐 수 있을 것이다.인도에는 ‘간디’만 있는 것이 아니다.
조국 인도의 진정한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불태운 청년
‘바가트 싱’을 소개한 국내 최초의 책.
그의 짧지만 강렬한 생애와 사상이 한 권의 책 속에서 펼쳐진다.
인도인들에게 영국의 식민 지배에 맞서 항거한 인물을 꼽으라고 하면 누구라고 대답할까? 물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디와 네루가 등장하겠지만 여기 매우 생소한 이름이 하나 추가된다. 바로 ‘바가트 싱’이다. 그가 인도 독립의 상징으로 민중의 가슴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는 아직도 인도 곳곳에 남아 있다. 인도 전역에 그의 포스터와 사진, 그림이 집 벽, 공공장소, 차량에까지 붙어 있고, 수천 개의 청년클럽이 그의 이름을 따른다. 영웅적인 행동과 희생을 기리는 노래와 시들이 인도 각지의 언어로 만들어져 세대를 이어 불리고 있다.
저자인 그레왈은 영국의 지배 아래 있던 인도의 시대 배경을 사실적인 필체로 그리며, 사료와 주변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해방 투쟁의 선두에서 인도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그의 족적을 담담히 따라가고 있다. 또한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그의 공적과 과실을 모두 다룸으로써 단순히 위대한 인물을 찬양하는 청소전 전기류의 책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뿐만 아니라 현직 정치인의 눈으로 인도의 근본적인 경제·사회적 불평등에 문제를 제기하고 인도 사회주의 정당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한다.
이 책은 그동안 간디주의 하의 역사적 시각에 가려져 왔던 ‘바가트 싱’이라는 인물을 국내에 처음 소개함으로써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죽어갔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자칫 인도 역사를 생소하게 느낄 수 있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서에 없는 사진 자료들을 다수 수록하고 참고자료를 포함해 읽을거리를 추가했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의 역사적 시각을 한층 넓힐 수 있을 것이다.
혁명적 테러리스트에서 대중 활동가로
바가트 싱은 23세의 짧은 생애 동안 인도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 불꽃의 삶을 살다 간 혁명가이다. 독립운동가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독립 투쟁에 합류한 그는 초기에는 테러리스트로서 이후에는 대중 활동가로서 역사적인 족적을 남긴다. 싱과 그의 동료들은 민족적 보복 행위로 영국의 고위층에 대한 테러를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민족 혁명가’나 ‘혁명적 테러리스트’에 머물지 않고 사상적으로 발전해 시각을 넓히고 사회주의와 계급 착취 없는 자유 인도 건설을 꿈꾸었다.
바가트 싱 역시 테러리즘의 한계를 깨닫고 대중 선동으로 노선을 전향한다. 1929년 4월 8일 그는 인도를 옥죄어 오는 영국의 잇따른 식민지 악법 제정에 항의하기 위해 의회에 가짜 폭탄을 터뜨리고 유인물 ‘귀먹은 자를 듣게 하라’를 뿌리면서 저항 없이 고의로 체포되었다. 1929년 6월 6일 그는 폭발사건 관련 법정을 대중 선동의 장으로 이용함으로써 인도 민중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의 폭발적인 인기는 영국뿐 아니라 국민회의 지도자들까지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그가 제국주의뿐 아니라 인도의 전통적인 계급과 착취에까지 항거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주의로 인한 기존 체제의 전복을 무엇보다 염려했는데, 여기서 간디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간디는 영국 총독에게 그의 사면을 요청하지 않았고 오히려 서둘러 처형할 것을 권고했다. 결국 그는 동료들과 함께 1931년 3월 23일 저녁 7시 33분 라호르 중앙감옥에서 처형되었다.
불멸의 아성 간디의 노선에 반기를 들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간디의 국민회의 노선에 회의를 느낀 새로운 혁명 세대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영국에 아첨하고 타협하기 급급한 국민회의 지도자들의 투쟁 방식은 갈수록 대중의 신망을 잃어갔다. 게다가 그들은 지주세력과 결탁해 진정한 의미의 해방, 즉 계급 없는 평등한 사회가 오는 것을 절대적으로 막고자 했다. 간디와 그의 사도들에 의해 제기된 비폭력운동은 인도 부르주아들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만 해방 투쟁을 유지시키는 데 아주 긴요하게 쓰였다. 그들은 제국주의자들만큼이나 대중운동에 대해 극심한 공포를 가지고 있었다.
바가트 싱과 동지들은 간디의 비폭력주의에서 벗어나 초기 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무장투쟁을 신뢰했다. 무장투쟁은 독립을 위해 대중을 각성시키는 주요 무기로서 혁명 조류의 상징이었다. 바가트 싱은 그들 중 가장 돋보이는 존재였고, 그의 이름은 ‘인퀼랍 진다바드(혁명 만세)’라는 전투 구호와 동의어가 되었다.
또한 단순한 테러리스트였던 구세대 혁명가들과 달리 혁명 신세대인 그들은 민족해방 투쟁의 구체적인 내용과 독립된 인도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비타협적인 투사이면서도 여타의 억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