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이 책의 주제는 ‘언론인 양기탁’이다. 1922년에 만주로 망명을 떠난 이후 양기탁의 활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국땅을 떠돌면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생을 마치는 비장한 최후는 생략된 것이다. 한국 언론사(言論史) 분야의 최고봉인 저자는 그가 국내에서 펼친 가장 치열했던 항일 언론인의 모습을 영국, 일본, 그리고 국내의 자료를 종합하여 복원하려고 노력했다.서재필기념회 선정 ‘올해의 민족 언론인’
양기탁(梁起鐸) 선생은 용기와 지조를 지닌 언론인이면서 독립투사였다. 그는 항일투쟁으로 일관한 일생을 살았던 분이다. 양기탁 선생은 서재필기념회(이사장 안병훈)의 2015년 ‘올해의 민족 언론인’으로 선정되었다.
양기탁의 활동 무대는 한국, 일본, 만주와 중국을 넘나드는 넓은 반경이었다. 어려서 배운 한학에 영어와 일어를 두루 구사할 수 있는 보기 드문 능력을 갖춘 언론인이었다.
이 책의 주제는 ‘언론인 양기탁’이다. 1922년에 만주로 망명을 떠난 이후 양기탁의 활동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국땅을 떠돌면서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생을 마치는 비장한 최후는 생략된 것이다. 한국 언론사(言論史) 분야의 최고봉인 저자는 그가 국내에서 펼친 가장 치열했던 항일 언론인의 모습을 영국, 일본, 그리고 국내의 자료를 종합하여 복원하려고 노력했다.
배설과 함께 대한매일신보를 이끈 쌍두마차
양기탁은 어려서는 한학을 공부했는데 서양 사람들과도 긴밀히 접촉하여 영어에 능통했고, 일본 나가사키(長崎)상업학교에서 2년간 한국어를 가르친 경력도 있어서 일본어를 구사할 수도 있었다. 서재필(徐載弼), 윤치호(尹致昊), 남궁억(南宮檍) 외에는 영어를 할 수 있는 언론인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는 한말 언론인 가운데는 드물게도 폭넓은 견문과 식견을 갖춘 지식인이었다. 일본과의 비타협적인 투쟁으로 몇 차례나 기소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외국의 언론은 양기탁을 대한매일신보와 영어신문 자매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의 한국인 편집인(Korean Editor) 또는 전무를 뜻하는 제너럴 매니저(General Manager)로도 불렀다. 국내에서의 통상적인 명칭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였다. 그는 영국인 배설(裴說, Ernest Thomas Bethell)이 발행하는 이 신문의 한글판, 국한문판, 영문판을 총괄하였다. 경영면에서는 전무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편집 제작에 있어서는 주필이자 편집국장의 위치였다.
「시일야방성대곡」을 전 세계에 알리다
대한매일신보는 애국 계몽운동의 본산이었다.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와 같은 당대의 논객이 이 신문의 지면을 통해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는 필봉을 휘둘렀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일제를 비판하는 장지연(張志淵)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1905년 11월20일자 황성신문 게재)을 영어로 번역하여 일주일 뒤인 11월 27일자 호외로 발행한 것은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번역된 장지연의 글은 일본에서 발간되는 영어신문과 미국에서 출간된 책에 실려서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신문에 실린 글들은 의병의 봉기를 선동하는 창의문(倡義文)과 다름이 없다고 통감부는 주장했다. 실제로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의 본거지가 되었고, 일본의 경제침략에 대항하는 국채보상운동의 성금이 신문사로 답지했다.
강제합방 직후 총독부는 양기탁을 보안법 위반으로 투옥했다가 다시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正毅)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조작하여 옥고를 치르게 했다. 신민회 사건 또는 105인 사건으로 부르는 민족진영에 대한 탄압이었고, 양기탁은 그 핵심에 있었다. 양기탁은 한말 언론인 가운데 일제에 의해 가장 빈번하게 투옥(投獄)된 인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