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공식 기억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 작업으로 기획되었다.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박제된 독립운동사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역사로서 살아 있는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 이 책은 2008년 10월 18일에 초판 발행된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의 개정판입니다.● 이 책은 2008년 10월 18일에 초판 발행된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의 개정판입니다.
1932년 1월 8일, 대일본 제국의 중심부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누군가 천황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것. 이 사건의 주인공은 거사를 앞두고 찍은 사진에서 수류탄을 양손에 쥐고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그는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저렇게 초연할 수 있었을까?
이봉창의 이 기묘한 사진은 독립운동사에서 유명한 대표적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이 합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언뜻 얼굴과 몸의 부조화만 봐도 의심이 들지만, 만들어진 사진이 ‘하나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의미를 쌓아가는 동안 당연해진 ‘사실’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기억과 사실의 차이, 이봉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인간과 영웅 사이, 박제된 독립운동사를 벗어나다
이봉창 의거를 기획한 김구는 사건 직후 〈동경작안의 진상〉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의거의 전모와 이봉창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힌 이 글은 이봉창의 사진과 맞물려 이봉창에 관한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르고 있는 김구의 이 글은 이봉창에 대한 부분적 진실만을 보여 줄 뿐이다.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로 쾌락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이봉창이 어떤 이유로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는지 이봉창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조응하며 변해간 역동적인 면모를 박제된 독립운동사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공식 기억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 작업으로 기획되었다.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박제된 독립운동사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역사로서 살아 있는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용산-오사카-도쿄-상하이, 동북아시아를 횡단한 식민지 청년 이주 노동자
이봉창은 보통의 독립운동가와 다른 삶을 살았다. 문창 보통 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상급 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과자 가게 점원, 약국 점원, 용산역 연결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도항까지 결심하게 되는 그의 삶은 밥벌이와의 지난한 싸움이었다. 일본에서 보낸 5년간 오카다 상회 총무, 표구점 심부름, 부두 노역, 스미토모 신동소 인부, 비누 가게 점원, 요리점 점원, 해산물 도매상 점원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 나도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차별이나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도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부탁하는 쪽이 나쁜 것이다. 유치한 것이다. 내가 조선인임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얼굴을 내미는 것이 잘못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인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신일본인이다.
(…) 그때 내 삶이 가치 없다고 깨달았으며 이 세상이 얄궂다는 것을 았았다. 그러나 상대는 일본인이다.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혹 억울하게 내던져지고 차인다 하더라도 말없이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일본으로 태어났으면 차별이나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 이봉창의 옥중수기 <상신서> 중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고민인 청년에게 ‘민족’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일제 강점기라는 모순에 가득 찬 시대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용산역에서 일할 때에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일본에서는 천황의 행차를 보러 갔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열흘간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부두 노역을 하면서도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썼을 때와 이봉창이라는 한글 이름을 썼을 때 불과 하루 만에 임금이 달라지는 일도 있었다.
영화와 음악을 즐겼고 술 때문에 빚에 쪼들리면서도 카페와 유곽을 드나들며 근대 소비문화를 향유하던 모던 보이의 ‘신일본인’으로 살겠다는 꿈은 시대에 의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분노와 체념을 홀로 머금고 있던 이봉창은 김구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육신의 쾌락이 아닌 조국의 독립이라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살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픽션으로 새로운 역사 읽기
술은 한량이 없고, 여색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노래는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훙커우에 거주한 지 1년이 채 안 되어서 그의 친구가 된 왜인 남녀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심지어 왜 경찰까지 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