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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여행을 하기로 결심했다. 아직 가슴이 뜨거울 때 다른 삶과 세상을 보며 혼란을 겪어보기 위해. 낯선 곳을 지치도록 걸어다니고, 마음 저 깊은 곳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정해진 것 없는 나날들을 스스로 결정해나가기 위해. 나 자신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들을 내려놓고 허물없는 나를 마주하기 위해. 지금 이 젊음이 모든 어리석은 방황과 실수에 면죄부가 되어주리라는 것을 알기에.
-프롤로그 ‘그럼에도 여행’ 중에서
여행에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기대 없이 베풀고 고맙게 받고 다시 누군가에게 베푸는 인간적인 ‘부등호’이자 ‘선순환 고리’를 만드는 것이다.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고, 손해를 보면서도 도움을 주는 사람들 덕분에 가난한 여행자의 마음은 고마움으로 차고 넘친다. 신기하게도 월급이 꼬박꼬박 들어와 주머니가 두둑했던 시절보다 여행을 하며 가난을 자처했던 시절, 내 생은 그 어느 때보다 넘치고 부유했다. 결국 마음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은 돈이 아닌 사람과의 만남인 것이다.
깨끗하게 비운 접시 위로,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것을 사준다고 할 때 따라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던 20년 전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낯선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작정이다. 낯선 이들과 함께 나누는 따뜻한 음식과 그들의 이야기는 나의 여행과 영혼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줄 테니까.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 바르셀로나 ‘사람을 만나다’ 중에서
낡고 허름한 숙소를 찾아오는 여행자들이 대게 그렇듯 우리는 모두 낡고 해진 청바지와 보풀이 일고 색이 바랜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게 입고 있는 서로의 모습에 동질감을 느껴 거리낌 없이 마음을 열 수 있었는지도. 낡은 것을 몸에 걸치고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직 우리 자신이 새것이고 젊기 때문일 것이다. 낡고 해진 옷을 입었지만 그녀들은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 되레 맑고 순수한 젊음의 생기로 가득했다.
그동안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 얼마나 목을 매며 시간을 허비하고 감정을 낭비했던가. 사람들을 얼마나 포장으로만 보고 있었는지, 나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던지. 좋은 옷과 가방이 아니고서는 자신을 증명할 수 없다고 느꼈던 과거의 풍요로운 삶에 연민을 느낀다.
-나를 위로하는 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우리가 친구가 된 이유’ 중에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여행하는 동안, 늘 무엇을 살지보다 무엇을 버릴지 고민했다. 무엇이 필요한지보다 무엇이 필요 없는지 생각했다. 가방의 무게와 생활의 불편을 끊임없이 저울질했다. 가이드북 없이 관광안내소에서 한 장짜리 지도 위에 갈 곳을 안내 받았고, 기념품을 사는 대신에 마음에 켜켜이 추억을 쌓아갔다. 언젠가부터 샴푸와 보디로션, 선크림만이 이십대 여자가 가진 화장품의 전부가 되었다.
스페인을 떠나던 날, 내 가방은 14킬로그램으로 홀쭉해졌지만 일상에는 부족함도 불편함도 없었다. 사실 필요한 것이 몇 가지 떠오르긴 하지만 더는 버릴 것이 없다는 점에서 완벽한 짐이었다. 내 삶이 한 손으로도 가뿐히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졌다고 느낀 순간, 묘한 행복감에 미소를 지었다.
-피카소를 만나다, 말라가 ‘가볍게, 더 가볍게’ 중에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