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 탄생시킨 새로운 단어들
두 번째 이야기
2020년 봄, 아미북스는암 경험자들의 가슴에서 건져 올린 단어들로 첫 책, <암밍아웃> 제주도 편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지난 1년간 <암밍아웃>을 통해 많은 암 경험자들을 글과 목소리와 얼굴로 만났고, 같이 울고, 웃고, 공감하며 <암밍아웃>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그렇게 아미북스는 지난 1년간 많은 ‘아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암밍아웃> 서울시장 편은 그렇게 만난 아미들과의 ‘수다’에서 시작됐습니다. 금정화, 유지현, 정수빈, 이정아, 이 네 여인은 각각의 자리에서 참 열심히 살아왔습니다.그녀 자신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누군가의 아내로, 엄마로, 며느리로… 그러던 어느 날 암 환자가 되었고,
삶의 세찬 바람 앞에 휘청이기도 했지만 ‘살아 있는 한 희망이고, 또 누군가의 희망이 되고 싶다’라며 <암밍아웃> 두 번째 책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는 ‘시장’을 무대로 담았습니다. 친정엄마의 장바구니가 그리운 딸, 살 것도 없이 시장 구석구석을 걸었던 소녀, 시장에서 시어머니를 엄마라고 부르는 며느리, 나를 사랑하기 위해 뒤늦게 시장을 찾은 나… 이들에게 시장은 엄마이고, 추억이고, 그리움이고, 끼니이고, 에너지였습니다. 내딛는 걸음마다 추억이 방울방울 솟아나는 시장에서 이들은 <암밍아웃>과 함께 또 하나의 ‘시장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글과 그림, 춤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아미, 금정화의 단어
<입원>
입원 사전적 뜻 : 환자가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일정한 기간 병원에 들어가 머무는 것.
금정화의 언어 : 다시 나에게로 가는 여행.
청소기를 밀고
세탁기를 돌리고
냉장고를 정리한다.
참기름에 애호박을 볶고
호두를 넣어 멸치도 조리고
콩나물국과 된장국을 끓이고…
시간에 쫓기며 나갈 준비를 한다.
그렇게
여행을 간다.
아니, 병원을 간다.
여행 가방을 싸듯
필요한 짐을 꾸리고
호텔 체크인하듯
입원 절차를 밟는다.
그리고 여행을 온 듯
주부가 아닌,
다시 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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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공동체를 꿈꾸는 아미, 유지현의 단어
<덤>
덤 사전적 뜻 : 제 값어치 외에 거저로 조금 더 얹어주는 일. 또는 그런 물건.
유지현의 언어 : 누군가가 인심 좋게 얹어주는 남은 생, 앞으로 살아갈 시간.
언제부터인가 재래시장이 불편했었다.
가격흥정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달라는 대로 값을 치르고 오면 꼭 바가지를 썼다.
깎아줄 것을 생각하고 부르는 값을
곧이곧대로 듣기 때문에 남보다 더 주고 사기 일쑤였다.
어린 시절, 엄마랑 같이 시장에 가면
몇십 원을 깎기 위해 실랑이하는 모습이 못마땅했고
결국엔 덤으로 한 주먹씩 더 얹어주면
그제야 끝나는 흥정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좀 능글맞아지면서
물건을 사며 깎아달라거나 더 달라거나 흥정을 한다.
그러면 또 인심 좋게 덤으로 뭐라도 하나 더 준다.
그게 시장 인심이고 정이라는 걸 알았다.
우리 몸은 허약하다. 돌아보니 이미 여러 번 죽을 뻔도 했다.
그런데도 이 허약한 몸으로 아직 살아있는 것이 기적이고 그저 감사할 뿐이다.
이것을 깨닫고 나니 남은 인생이 덤이요, 축복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목숨값을 주관하는 누군가가 인심 좋게 더 얹어준 덤 말이다.
이제 난 내 목숨값을 주관하는 누군가에게 능글맞게 빌어본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으니 내 인생의 시간을 더 달라고 말이다.
흥정은 안 통할 테니 인심 좋게 덤으로 더 얹어달라고 빌어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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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으로 온기를 나누는 아미, 이정아의 단어
<암>
암 사전적 뜻 : 끝없이 분열하여 혈액이나 림프관을 통하여 다른 장기까지 전파될 수 있는 세포 덩어리.
이정아의 뜻 : 새로운 나
암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선 엄마를 데려갔고
20년 후엔 나보다 여섯 살 많은 오빠를 데려갔다.
그리고 10년이 더 흐른 후엔 나를 찾아왔다.
열 살짜리 막내아들 옆에 두고
암을 진단받던 날,
주책없이 눈물이 터져버렸다.
그 옛날 병원에서 돌아오지 못한 엄마가 생각났고… 겁이 났다.
생각보다 순조로웠던 치료 후
지금의 나는 암을 만나기 전과 많이 달라졌다.
무력하게 엄마와 오빠를 떠나보내야 했던 어린 소녀는
어느새 암이라는 이 녀석을 이겨보리라 마음먹으며
오늘도 암이랑 맞짱 뜨며 잘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