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잖아. 그때 왜 죽지 않았어?”
그해 가을, 네 친구를 둘러싸고 벌어진 끔찍한 사고
동경과 질투, 애증으로 점철된 서늘한 서스펜스
지수는 자신을 몰아세우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 “경력을 향한 목표. 성취감과 쾌감. 숨 막힐 정도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한 끝에 누리는 강렬한 자극”에 중독되어 있다.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완벽하게 통제할 때 느껴지는 희열. 지수의 애인 ‘태인’은 지수에게 말한다. “너한테는 항상 일이 전부지. 일 이외에 의미 있는 게 있기나 해?” 하지만 지수는 개의치 않는다. 일 이외에 의미 있는 일이 지수에게도 있다는 걸 태인은 모르기 때문이다. 176센티미터에 50킬로그램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는 ‘지수’는 심각한 거식증과 폭식증을 앓고 있다. 경우에 따라 식욕억제제까지 먹는다. 태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몰라야만 했다.
“밥 몇 숟가락에 반찬 조금. 아니면 빵 한 조각. 계란 하나. 당근이나 오이. 방울토마토. 그게 나의 주식이라는 걸 절대 몰랐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평범한 사람들처럼 먹었으니까. 밥 한 공기를 야무지게 싹싹 먹어치웠으니까. 몸무게를 신경 쓰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아니, 원래 마른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랬다.”(40쪽)
중차대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지수는 급속도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다. 너무 무리해서 그런 거라고, 피로가 쌓인 것일 뿐이니 좀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말하며 휴가차 고향인 ‘안진’에 내려간다. 지수의 엄마는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딸에게 밥을 차려준다. 너무 말랐다며 걱정을 내비치는 엄마를 앞에 두고 지수는 떠올린다. 비만이었던 열다섯의 자신을 엄마가 얼마나 난처해했는지, 그런 자신을 앞에 두고 친척들이 얼마나 쑥덕거렸는지. 한편 지수의 엄마는 자신이 참여하는 요리 세미나 ‘채수회’에 채소를 조달해주는 청년의 아내가 지수의 동창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신아. 지수는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묻어두었던 학창 시절을 회상한다. 자신이 동경했던 해리아와 해리아 주변을 맴돌던 아이들-신아와 지연을.
“참 뻔했다.
어쩌면 이렇게 모든 것이 예상대로니 신아야. 세월이 이만큼 지났는데 말이야. 너나 나나 참,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 있니.
아니지. 나는 아니야. 나는 달라졌어. 너는 모르겠지만 나는 알아.
내가 달라졌다는 걸 말이야. 신아야. 응?
하지만 전혀 변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신아는 언제나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는 것.”(60쪽)
해리아. 그 당시 지수의 관심사는 오직 해리아였다. 지수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그랬다. 심지어 학교 선생들까지도. 큰 키와 가늘고 쭉 뻗은 두 다리로 운동장을 질주하던 아름다운 해리아. 공부도 잘하고 심지어 다정하기까지 했던, ‘우리’ 모두의 해리아. 신아는 오히려 지수의 걸림돌이었다. 해리아 곁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던 신아는 지수를 늘 경계했다. 영직동을 사이비 소굴로 만들어버린 조칠현 교회의 신자. 사실 신아만 조칠현 교회의 신자였던 건 아니다. 해리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해리아는 절대 자신이 조칠현 교회의 신자라는 것을 밖에서 티 내지 않았다. 그래서 해리아는 늘 소문의 중심에 있었다. 그 공부 잘하는 애. 107동 사는 걔. 지수는 엄마의 핸드폰을 뒤져 신아의 흔적을 찾아낸다. 그때도 지금도, 지수의 관심사는 신아가 아니다. 오직 해리아. 나의 해리아. 그렇게 신아와 해리아의 이름이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른 다음날 아침. 지옥이 시작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시간에 언제나 잠들어 있다. (……) 마음을 지치게 만드는 것들. 기억들. 가슴을 쿡쿡 찌르는 단어들. 그런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무의식이라는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을 둘둘 말고 있다. 부러워. 그렇게 쉴 수 있는 사람들. 마음 편히 잠들고 개운하게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56쪽)
“더 끈질겨지고 더 간절해졌다. 더 적나라하고 더 무섭다.
강화길의 이 작정은 마침내 연서가 되었다.”
방향을 정한 강화길은 뒤돌아보지 않는다. 빠르게 내달린다. 멈추지 않는다. 《치유의 빛》은 ‘몸’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내세우며 하나의 덩어리-몸-에 갇힌 인물들의 서사를 묵직하게 쌓아 올린다. 가족, 타인의 시선, 학교, 도시, 마을, 종교 등 여성을 둘러싼 억압의 레이어를 중첩시키고 도려내듯 다시 벗겨낸다. 표출하지 못해 짓눌린 감정. 통증으로 뒤덮인 신체.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단단히 뭉쳐진다. 한 단어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그 모든 덩어리들을 품은 채 살아가야 하는 인물은 곧 독자의 거울이다. 나아가 소설에 설화처럼 등장하는 이야기 ‘힐라리아와 안티오페’, ‘호랑이 뱃속에 들어간 여인들’은 《치유의 빛》에서 다루는 몸이라는 공간에 대한 거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작품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치유의 빛》은 하나의 몸이자 공간으로 완성될 것이다. ‘강화길이라는 장르’ 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