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홍신 강력 추천!
“억지로 참지 마, 우리는 모두 충분한 애도를 해야 해.”
부드럽고 단단한 마음을 이해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에게
기꺼이 곁을 내어주는 여덟 편의 이야기!
모든 것이 지나간 자리, 감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김혜영 작가의 첫 소설집 『아보카도』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이 아니라 그 여운을 따라가는 책이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명확한 사건 중심의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누군가 죽거나, 떠나보내거나, 어떤 관계들이 끝나지만, 그건 소설의 시작일 뿐이다. 이 책은 ‘어떤 일이 있었는가?’보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어떤 감정이 남았는가?’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진다. 각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아주 격렬하게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감정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조금씩 그것을 정리해 나간다. 김혜영 작가의 소설은 이처럼 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남긴다. 우리는 끝나지 않은 소설 속 감정의 밀도를 읽으며, 언뜻 고요하지만 끝내 깊이 흔들리는 서사를 몸소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의 인물들은 감정을 명료하게 정리하거나 외부로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다. 대체로 침묵하거나 회피하고, 혹은 일상에 감정을 묻은 채 살아가기도 한다. 「박수기정 노을」의 미현은 친구의 죽음을 뒤늦게 전해 듣고 늦은 애도를 시작한다. 「지연」의 지연은 비로소 알게 된 가족의 진실 너머에서 성장 과정 속 슬픔을 본다. “억지로 참지 마, 우리는 모두 충분한 애도를 해야 해”(42쪽)라는 문장처럼, 인물들은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거나 끝맺지 않고 지나간 일들에 마음으로써 다가가고자 노력한다. 이 문장 속에는 감정을 억누르지 말라는 권유가 있지만, 동시에 그 감정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해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김혜영 작가는 그 모호함을 회피하지 않고, 감정의 처리보다는 감정의 ‘머무름’에 집중한다.
그래서 이 책은 감정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 속에 매몰되지 않는 드문 소설집이다. 우리는 인물들이 끝내 표현하지 못한 감정을 짐작하고, 그 마음이 남은 자리를 오래 응시하게 된다. 이처럼 절제된 태도는 때로 냉정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정교하게 다듬어진 마음의 윤곽이 있다. 『아보카도』는 우리가 미처 끝내지 못한 감정에 대해, 그리고 그 감정이 삶에 남기는 흔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살아있는 자의 자리
『아보카도』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남겨진 사람들’이다. 죽은 자가 떠난 자리, 끝난 관계가 빠져나간 공간, 무너진 가족과 그 이후의 일상 등이 그러하다. 이들은 모두 어떤 큰 사건 이후에도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대부분 조용하고, 반복적이고, 감정이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을 대변하거나, 섣불리 재단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그들을 따라간다. 그들의 감정을 드러내거나 판단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대신 무너지기 직전의 태도를 유지하는 삶을 조용히 관찰한다.
특히 인상적인 건 이 모든 작품이 위로나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역시 우리 삶의 방식과 궤를 함께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 불완전함 속에서 인물의 진실을 발견한다. 김혜영 작가는 갈등을 해결하지 않고, 감정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 모든 불완전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혹은 우리의 태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이는 단순한 관찰이 아니라 지금 이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기도 하다.
『아보카도』는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에 대해, 끝난 관계보다 그 이후를 견디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한다. 애도를 마친 사람, 애도를 시작하지 못한 사람, 감정을 유예한 사람 등, 이 책의 인물들은 때로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등장하며, 그렇게 미완의 상태로 살아가기도 한다. 그 모습은 때로 막막하고 냉담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감정의 진짜 결이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 『아보카도』는 그 결을 지나치지 않고 붙잡으며 소설이 지금 할 수 있는 정직한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을 지녔다.
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이야기
좀처럼 말이 없는 이 소설집은 큰 사건이 있어도, 감정이 흔들려도, 속마음을 잘 털어놓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감각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말하지 않는 쪽을 선택할 뿐이다. 울지 않고, 고백하지 않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저 일어난 일들을 바라본다. 그런 인물들을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 감정이 더 크게 느껴진다. 아마도 말하지 않기 때문에 더 잘 들리는 종류의 감정들일 것이다.
「너의 찰스」의 인물은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끝내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진술하지 않는다. “찰스가 짖는지 내가 낸 소리인지 이제는 정말 모르겠다.”(226쪽)라는 문장은 혼란과 붕괴의 감각을 단순하게 표현하면서도 깊은 충격을 안긴다. 재건축을 앞둔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공가」에서는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이 깨진 감정들”(94쪽)이라는 말을 통해 감정이 대사보다 장면 속에 더 선명히 남는 방식을 보여준다. 이러한 문장들은 소설 전체가 지닌 태도처럼 읽힌다.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음으로써 감정의 깊이를 확보하는 방식이다.
이 책은 감정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그것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취한다. 담백한 문장들이 그려내는 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하루하루다. 억지로 읽는 이들의 손을 잡아 이끌지 않고, 관계를 끝까지 설명하지도 않는다. 대신 정지된 순간에 오래 머무르게 하며, 그 모든 풍경이 낯설어지게 만든다. 그 리듬에 익숙해지는 순간 이 책은 꽤 매력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감정의 바깥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거기서 감정의 본모습을 보여준다. 말 없는 방식으로, 말 많은 시대를 건드리는 소설이다. 그야말로 지금의 한국 문학이 도달한 또 하나의 경계 위에서, 그리고 동시대 서사에 가능한 방식으로 응답하는 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