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인권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너머로
작은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탈주〉 이종필 영화감독 추천!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의 한가운데에서 가장 나약한 존재들이 그리는 대서사시
학교에서 수령님 탄신일을 축하하기 위한 노래자랑이 열리던 날, 소원은 막둥이의 고운 노래 실력을 이용해 상금을 타고자 막둥이를 학교에 데려가기로 작정한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락방에서 종일 홀로 지내던 막둥이는 난생처음 바깥으로 나와 소원과 함께 학교로 향한다. 남들보다 유난히 검은 피부를 가리기 위해 누나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판다곰 인형을 얼굴에 뒤집어쓴 채로. 하지만 소원의 지나친 과욕은 결국 비극을 초래하게 되고, 이들의 운명은 손쓸 수 없이 빠르게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막둥이의 존재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홍 할머니는 손주들을 지키기 위해 인생을 건 마지막 선택을 내린다.
끝없이 되돌아오는 차가운 비바람 속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또다시 한 발 한 발 내딛는 이들의 힘겨운 싸움은 소설 속 배경이 되는 비무장 갯벌과 흡사하다. 아무리 걷고 또 걸어도 자꾸만 갯벌 안으로 발이 푹푹 빠지고 묶인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 한 걸음이라도 내딛을 수 있다면 아직 끝이 아니다. 그 끝이 어딘지, 마지막에 그토록 바라던 자유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오로지 살기 위해 발버둥 쳐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인 우리 역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영화인이 쓰고 그린 이 기록이 새로운 역사의 출발을 알리는 시발점이 되어 주기를 기대해 본다.
끝없는 균열 속에서도 아량 넓은 회색주의자를 꿈꾸다
〈싱잉로드〉는 저자가 군 시절에 겪은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어졌다. 강화도에서 군 복무를 하던 시절, 북한 민간인이 산 채로 강가를 따라 떠내려온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서 양측 군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라고는 그저 고속 단정을 타고 나가 한계선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유엔군만이 비무장 지대인 강 안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민간인은 하염없이 물속을 떠다니다가 익사했다. 타인의 생명이 꺼져 가는 상황에서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비극의 기억은 소원과 막둥이의 서사로 재탄생했다. 또한 〈싱잉로드〉는 저자의 삶과도 밀접하게 닿아 있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전환, 외국 생활 속에서 느낀 이방인의 삶, 정치적 대립과 이념의 양극화 등 지속적으로 상충을 겪어 온 저자는 공허한 균열을 메워 줄 수 있는 회색주의자를 꿈꾼다. 어떠한 편 가르기도 없이, 흑과 백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아량 넓은 회색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소망을 글과 그림 안에 담았다.
독재적인 체제와 감시의 눈길 속에서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끝까지 생의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소원과 막둥이, 손주들의 자유를 위해 대담한 결단을 내리는 홍 할머니를 두고 영화 〈탈주〉를 연출한 이종필 감독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싱잉로드〉는 북한 인권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니라 이데올로기 너머로 작은 소원을 품고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다.” 이처럼 〈싱잉로드〉는 어둠 속에 꽁꽁 묶였지만 결코 삶을 포기하지 않고 밝은 빛을 향해 날아오르려는 우리 모두의 도전이자 외침이기도 하다. 오직 한국인만이 그릴 수 있고, 쓸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저자의 서랍 속에 묵혀 있다가 15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위대한 예술 작품이 스스로 빛을 내며 생명력을 발산하듯이,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가득한 〈싱잉로드〉가 전하는 강력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