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G. 피히테에서 가야트리 스피박까지,
내셔널리즘을 논할 때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명저 50선.
네이션(nation)이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는 현상이 이미 고대에 존재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것들이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 대상이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20세기 말 에릭 홉스봄은 네이션의 관념이나 내셔널리즘 운동이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내셔널리즘은 세계 각지에서 그 힘을 과시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결실을 거두면서 질적인 전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은 정치학,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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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G. 피히테에서 가야트리 스피박까지,
내셔널리즘을 논할 때 반드시 짚어보아야 할 명저 50선.
네이션(nation)이나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라는 현상이 이미 고대에 존재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것들이 본격적으로 학문적 탐구 대상이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20세기 말 에릭 홉스봄은 네이션의 관념이나 내셔널리즘 운동이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오히려 내셔널리즘은 세계 각지에서 그 힘을 과시하였으며 이후로도 많은 결실을 거두면서 질적인 전환을 거듭하고 있다. 이 책은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사회언어학, 문화연구, 문학연구,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내셔널리즘 관련 저작 가운데 고전의 지위를 획득하거나 새로운 지평을 연 50편을 분석함으로써, 오늘날의 내셔널리즘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밑그림을 제공하고 있다.
왜 아직도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하는가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내셔널리즘이 머지않아 종말을 고하리라고 예견해왔다. 전 세계는 점점 더 하나의 공동체에 가까워질 것이므로 내셔널리즘이 설 자리가 없어질 것이라는 말이었다. 에릭 홉스봄은 <1780년 이후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1990)에서 네이션(nation)의 관념이나 내셔널리즘의 운동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적중하지 않은 것 같다. 냉전의 종식, 경제적·문화적 글로벌화로 인해 내셔널리즘이 쇠퇴할 것처럼 보였지만 그 이후에도 오히려 세계 각지에서 강화되어 힘을 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은 근대세계의 형성과 발전에 발맞추어 지금까지 제국주의적 침탈, 사회주의 혁명, 식민지 독립운동 등 다양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패턴과 융합하여 힘을 떨쳐왔고, 오늘날에도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질적인 전환을 거듭하고 있다. 두 세기 이상에 걸쳐 내셔널리즘은 중요한 이데올로이자 정서이자 정치로서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나갈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 내셔널리즘 운동은 주권적 민족국가 수립(독립)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치권 이양 또는 문화적 승인 등을 겨냥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셔널리즘이 이러한 변용을 겪고 있다면, 오늘날 우리가 내셔널리즘을 생각하고 그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시사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내셔널리즘 연구자들은 대체로 자신의 전공에 치중하게 되므로 다른 학문 영역에서 논의되는 내셔널리즘론의 동향에는 어두운 편이다. 하지만 내셔널리즘이 현재 여러 분야에서 어떠한 흐름으로 연구되어왔는지에 대해 종합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자료는 드물다. 이런 점에서 정치학, 사회학, 역사학, 사회언어학, 문화연구, 문학연구, 철학 등 각 학문 분야에 걸쳐 내셔널리즘을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필독서를 소개하는 <내셔널리즘론의 명저 50>은 오늘날의 내셔널리즘을 넓고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할 것이다.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을 바라보는 두 가지 입장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은 19세기부터 오늘날까지 여러 영역에서 활발하게 논의해온 인기 주제이지만, 동시에 사회·인문과학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개념 가운데 하나이다. 내셔널리즘은 이데올로기일 수도 있고, 정치운동을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으며, 또는 정서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 때문에 그 의미도 다의적인데, 이는 내셔널리즘이 국가주의, 민족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 민족자결주의, 국민주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이라는 현상의 기원을 둘러싸고도 상반된 입장이 엇갈린다. 18세기 말에야 출현한 근대적인 현상으로 보는 입장(근대주의)이 있는가 하면, 네이션 혹은 그 맹아(萌芽)가 될 만한 공동체는 고대부터 이미 존재했다고 보는 입장(원초주의)도 있다. 대체로 내셔널리스트들은 네이션이 고대부터 기원하는 것이며, 가족이나 촌락과 마찬가지로 전체 인류사에 걸쳐 존속해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실증적 사실로부터 추론하여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은 근대사회의 산물이며 그 이전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여러 입장이 대립하는 가운데서도 확실한 것은, 네이션이라는 말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의 일이며, 내셔널리즘이란 말이 일반에 널리 정착한 것은 19세기 말의 일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네이션이나 내셔널리즘이 본격적으로 학문적인 탐구의 대상이 된 것은 20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내셔널리즘의 본질을 분석한 저작에서 개별 사례연구까지
<내셔널리즘론의 명저 50>은 두 가지 유형의 고전적 ‘국민’ 개념을 대표하는 두 저작을 소개하면서 시작한다. 1807~1808년 베를린에서 펼쳐진 요한 G. 피히테의 연속 강연을 묶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언급한 ‘국민’은 종족적 본질과 연결된 유기체적인 것이며 독일어라는 언어에 의해 묶인다. 한편 J. 에르네스트 르낭이 1882년 소르본에서 행한 강연을 담은 <국민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국민’이 인종이나 언어가 아니라 의지나 선택에 따라 구성된 것이라고 하는데, 이는 개인주의나 민주주의에 적합한 것이다.
이 두 고전을 제외하면, <내셔널리즘론의 명저 50>에 소개된 저작은 대부분 20세기 초 이후의 것들이다. 정치적 의지에 기초한 합리적인 ‘서구형’ 내셔널리즘, 문화적 동질성에 기초한 비합리적인 ‘동구형’ 내셔널리즘이라는 이분법을 제시하며 내셔널리즘론의 체계화에 기여한 한스 콘의 <내셔널리즘의 사상>(1944), ‘교의(doctrine)로서의 내셔널리즘’을 칸트의 자유론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서술한 엘리 케두리의 <내셔널리즘>(1960) 등은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성격을 체계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이후의 내셔널리즘 연구에 이론적 틀을 제공한 역작들이다.
내셔널리즘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저작은 이후에도 꾸준히 등장했는데, 내셔널리즘을 ‘산업화’를 통해 명쾌하게 설명한 어니스트 겔너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1983), ‘상상’, ‘신성한 언어’, ‘메시아적 시간’, ‘출판자본주의’ 등 새로운 키워드를 제시하며 지금까지 고려되지 않았던 새로운 내셔널리즘론을 보여준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1983)는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이 근대의 산물이라는 이론의 도달점을 보여주는 대표적 저서이다.
< 내셔널리즘론의 명저 50>은 내셔널리즘 일반에 대한 이론을 세운 저작뿐만 아니라 개별사례를 연구한 책들도 주목한다. 네이선 글레이저·대니얼 P. 모이니헌의 <인종의 도가니를 넘어서>(1963)는 복잡한 이민으로 형성된 국가인 미국의 사례를 들여다보는 책이며, 쓰치야 겐지의 <카르티니의 풍경>(1991)은 네덜란드의 식민통치를 겪은 인도네시아의 내셔널리즘을 이야기한다.
무엇보다도 일본에서 활동하는 학자들의 서평을 담은 이 책은 일본의 내셔널리즘론을 소개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일본의 내셔널리즘은 근대천황제의 성립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천황제와 내셔널리즘을 고찰한 저작으로,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1956/57), 하시카와 분조의 <쇼와 내셔널리즘의 여러 모습>(1994), 다키 고지의 <천황의 초상>(1988), 야스마루 요시오의 <근대 천황상의 형성>(1992), 다카시 후지타니의 <화려한 군주제>(1996) 등을 소개한다. 또 다케다 세이지의 <‘재일’이라는 근거>(1983)는 재일조선인의 문제를 다룬 저작으로 주목할 만하다.
< 책 속으로 추가 >
다키 고지(多木浩二), <천황의 초상>
구미열강의 압력에 노출되어 있던 유신정부에게는, 근대국가 ‘일본’을 한시라도 빨리 건국하기 위해서는 천황을 국가의 통치자로서 일반 민중에게 지속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 필요했다. (…) 그러나 메이지 초기의 일본사회에는 종래의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교통수단으로서는 우마차 또는 배[船]밖에 없었다. 또한 정보미디어에서도 질과 양 모두 그 유통이 지극히 제한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민중들에게 자신들이 천황의 직접적인 통치 대상자들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서는 상응하는 정략(政略)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유신정부가 행한 정치적 기술로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일반적으로 ‘어진영(御眞影, 고진에이)’이라고 불렸던 메이지 천황의 초상 사진이다(이후에는 다이쇼大正·쇼와昭和 천황의 사진도 동일하게 지칭되었다). 이 사진은 천황과 동일시되어 다뤄졌고, 이를 위한 일련의 예배의례가 만들어졌다. 그 의례는 천황제 국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아주 엄격한 하나의 장치가 되었다. 다키 고지의 <천황의 초상>은 그 ‘어진영’이 성립해가는 과정을 분석하여, 그 가운데 놀랄 만한 ‘정치’가 개입하고 있다는 것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336쪽
에릭 J. 홉스봄(Eric J. Hobsbawm), <1780년 이후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
이 책은 1985년 벨파스트의 퀸스대학교에서 열린 초청강연에 기초한 것이다. 20세기를 살아온 역사가가 연구의 폭넓은 시야를 살려서,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이라는 근대사를 선도해온 관념과 운동에 대해 기술한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경험적 역사연구의 시점에서, 단순 사실의 나열이 아니면서 간결한 전망을 덧붙인다는 어려운 과제에 도전한 것이기도 하다. 홉스봄의 마르크스주의 이론 그 자체는 때때로 평범하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이 책이나 <만들어진 전통>에서 볼 수 있는 홉스봄의 시점은, 인류학과 문화연구, 사회학과 정치사상사를 횡단하고, 경험적 사실의 풍부함과 복잡함을 고집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시점은 좁은 의미의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넘어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이라는 ‘근대의 교의(敎義)’의 다형성(多形性), 즉 프로그램이면서 동시에 신화이기도 하고 현실이기도 하다는 상상 속의 키메라(Chimera)와 같은 다형성을 선명히 묘사해내고 있다. 이 책은 다른 별에서 온 역사가에게 보내는 보고서와 같이 간결하고 개설적이다. 이 책 속에는 더욱 상세한 조사를 필요로 하는 다양한 문제나 가설, 또는 수수께끼가 별처럼 여기저기 박혀 있다. ―368~3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