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 시인은 물질에 지배당하는 현실을 시로 성찰하고 있다. 시인은 물질에 대한 반성적 자각으로 존재를 바라본다. 우리는 소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며, 이제 물질은 자신의 신분을 재는 척도이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을 추구해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원하는 물질을 소유하는 순간은 잠시 행복할 뿐 오래 가지 않고 물질에 대한 욕구는 새로운 물질로 끊임없이 이행한다. 이러한 욕구는 나와 네가 경쟁하는 방식이기에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경쟁이므로 이기는 방법은 경쟁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자신이 느끼는 통각의 지점에서 세상을 들여다본다. 현대사회의 특징을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욕망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우리의 감각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상품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물질이 존재를 대체한다는 자각이 고개를 든다. 동시에 사회적 행위에서 발생하는 생리적 자극과 지각의 상호작용이 통증을 유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통각의 발견이다. 그러므로 손영의 시는 들뢰즈가 언급한 공명의 영역 속에서 통각의 언어로 구축한 감각적 세계이다. -해설에서
욕망과 통각痛覺의 언어로서의 시
모든 주체의 욕망이 뒤엉키는 곳이 삶의 현장이다. 때로 시는 이 지점을 발화지점으로 삼으면서, 통각의 언어로 특별한 세계를 만든다. 통각의 언어에 있어서 시인의 시는 감각의 프레임에 붙잡힌 기억을 수평 선상에 놓고 시적 사유를 전개한다. 시적 주체는 “새 물건은 빠르게 세력을 넓혀가지//큰 목소리에 나는 맥없이 투항하지//내가 들고 왔는데 나보다 힘이 세지”(「물건들」)처럼 물화의 프레임에 걸린 자신을 본다. 세상의 모든 사물이 욕망의 불꽃을 피운다. 이제 ‘나’는 소유한 것으로부터 지배를 받는 존재로 전락한다. 시적 주체는 타자화된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화면을 들여다보며 보정 작업을 하는 사진사”(「증명사진」)를 응시하고 있다. 오직 타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얼굴에 필러 시술을 하고, 보톡스로 이마의 주름살을 없앤다. 삶의 주체는 타자의 욕망 때문에 더 이상 순백의 대지 위에 설 수 없다. 지금 여기는 온갖 종류의 욕망으로 통증을 생산하는 중이다.
시인은 통각의 순간을 시적 발화지점으로 삼는다. 주체는 감각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통각 속에서 사건이 발생했음을 깨닫는다. 통각은 시인에게 시적 사유가 솟아날 수 있게 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수요일이 물속에 있다
가끔 물 밖으로 꺼내 본다
물에서 단단하던 수요일이 물 밖으로 나오면 젖는다
말려도 보송해지지 않는다
〈중략〉
내 곁을 떠났던 사람들은 모두 수요일
물속으로 나를 밀어버린 사람들도 수요일이야
나쁜 일 많던 수요일
덜 잠겨진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멈출 수 없는 수요일이야
수요일의 팔을 흔들고 매달려도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 물처럼
수요일은 잠잠한 흐느낌이야
-「수요일이 물속에 있다」 부분
표제작 「수요일이 물속에 있다」의 시적 화자는 존재가 물속에 갇힌 날을 수요일로 본다. 이 땅에 생존하는 존재는 욕망이 너무 강하다. 수많은 욕망이 뒤섞이는 지상은 투쟁이 치열한 곳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거대한 원형 감옥이다. 우리는 파놉티콘의 규율을 내면화한 채 스스로 감시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특히 현대사회는 감시하는 자가 감시당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나’를 은폐할 수 있는 물속이 좋다. 이러한 현상을 증명하기 위해 화자는 “물에서 단단하던 수요일이 물 밖으로 나오면 젖는다”고 자신 있게 진술한다.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고 이상을 좇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상을 은폐시킨다. 사회 규율을 내면화하며 추구하던 이상은 이제 물속에 잠겨 있다. 일상적 행위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수요일은 잠잠한 흐느낌이야”처럼 물속이 편안하다. 따라서 물속에 잠겨 천 년을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을 키우기도 한다. 물속은 세상과 경계를 달리하므로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이 없다. 그러므로 감시의 눈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공간이다.
과체중의 집이 헉헉거려요
옷장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옷걸이에 난민처럼 매달려 있어요 옷들이 삐져나와 닫히지 않은 장롱이 소화제를 찾아요 주방에는 접시 프라이팬 냄비를 쌓아 둔 찬장과 수납장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었어요
냉동실 문을 억지로 깨워요 검은 비닐에 싸인 삼겹살 목살 뱃살 그 위에 바다와 들판이 누르고 있어요 투 도어 냉장고 문을 여는 순간 지금이 탈출할 기회라는 듯 한꺼번에 와르르 쏟아져요
목까지 채워도 냉장고와 옷걸이, 신발장은 왜 매일 허기진 신음을 보내는 걸까요 비만한 옷장이 비명을 질러도 거울의 비위를 맞추기 어려워요 많아진 나를 내밀어도 계속 고개를 저어요 외출을 접고 구입할 날개와 구름의 리스트를 다시 만들어요 -「쇼핑의 변명」 부분
쇼핑하는 행위는 물질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사회를 내면화한 화자는 “옷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옷들이 행거에 난민처럼 매달려” 있어도 쇼핑을 멈추지 않는다. 상품을 구입했을 때 치솟는 행복의 도파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은 일시적이다. 지속되지 않는 행복은 쇼핑에 더욱 빠지게 만든다. 상품을 소유해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는 “찬장과 수납장의 어깨가 한쪽으로” 기울어져도 멈추지 않는다. 화자는 상품 구입에 중독되고 동시에 도파민에 중독된다. 더 많은 양의 상품을 구입하면 도파민도 그만큼 많이 나올 거라 믿는다. 상품 제조사의 광고는 소비자의 욕구를 끊임없이 부채질하고, 소비자는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행복을 산다는 착각에 빠진다. 행복해지기 위해 소비자는 상품을 구입한다. 도파민 촉발을 원하는 화자는 “비닐에 싸인 삼겹살 목살 뱃살 그 위에 바다와 들판”을 냉장고에 넣어 둔다. 하지만, 행복은 어느 공간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물질에 지배당하는 현실을 시로 성찰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사적 소유권을 천부 권리로 인정한다. 삶의 주체들은 이런 체제에서 소유를 마음껏 추구한다. 비움보다는 채움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계층이 높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모두가 소유물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을 갖는다. 이제 물질은 자신의 신분을 재는 척도이다. 이성의 힘으로 만들어 놓은 체제 안에서 경쟁만 치열할 뿐, 자본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달려가도 행복의 정점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 들고 사회는 불평등하다. 아무리 물질을 추구해도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원하는 물질을 소유하는 순간만 잠시 행복하다. 행복은 그리 오래 가지 않고, 물질에 대한 욕구는 새로운 물질로 끊임없이 이행한다. 이러한 욕구는 나와 네가 경쟁하는 방식이며, 누구도 이길 수 없는 경쟁을 우리는 계속한다. 유일하게 이기는 방법은 경쟁하지 않는 것이다.
시인은 물질에 대한 반성적 자각으로 존재를 바라본다. 과잉 생산된 상품은 우리의 욕구를 끊임없이 자극한다. 지금 여기의 매체는 상품과 행복이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왜곡된 광고로 소비자를 끊임없이 세뇌한다.
시인은 자신이 느끼는 통각의 지점에서 세상을 들여다본다. 현대사회의 특징을 분해하고 재조립하여 욕망의 움직임을 관찰한다. 우리의 감각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상품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 물질이 존재를 대체한다는 자각이 고개를 든다. 동시에 사회적 행위에서 발생하는 생리적 자극과 지각의 상호작용이 통증을 유발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통각의 발견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는 들뢰즈가 언급한 공명의 영역 속에서 통각의 언어로 구축한 감각적 세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