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그리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여성 지식인 최영숙의 꿈과 투쟁에 관한 이야기
첫 번째 소설 「시그투나」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유럽으로 건너간 최영숙의 눈으로 억압과 자유, 고립과 연대를 교차시킨다. 1927년 스웨덴의 고요한 마을 시그투나. 이 작은 마을에 거주하는 조선인이라곤 그녀 한 사람뿐이다. 멜라렌 호수의 찬란한 빛과 한여름의 향연 속에서도 그녀의 기억은 늘 조국으로 되돌아간다. 3·1운동의 거리로,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벽으로, 그리고 동지들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으로.
내가 경험한 수치를, 끝없는 절망을 이토록 평화로운 스웨덴의 사람들에게 밝힐 수 있을까요? 1919년 3월의 일을 그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상상이 아니라 진짜로 벌어진 일이고, 여전히 계속된다는 것을, 더 심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_본문 25쪽
최영숙은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글을 쓰면서, 동급생 리사와 대화하면서 낯선 자유의 공기를 마신다. 하지만 동시에 멀리 떨어진 조국의 아픔을 증언해야 한다는 사명 또한 짊어진다. 그녀의 글은 단지 일기의 조각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절규이자 미래 세대를 향한 편지로 읽힌다.
청춘과 함께 사라진 열정과 순수
그 극적이고 서글픈 쇠락
두 번째 소설 「인도차이나」는 사십 대 소설가인 ‘나’와 영화 제작자인 ‘R’이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소도시의 서점으로 향하며 펼쳐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젊고 유망했던 청년 예술가였던 ‘나’는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흔하디흔한 예술계의 노동자가 되었다. 한때는 순수한 열정과 재능을 오롯이 쏟아부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저 생계 수단이 되어버린 일에 피로만이 남았을 뿐이다.
“웃기지 마. 그때 정말 자기가 어리다고 생각했어? 난 아닌데? 난 책도 썼잖아. 이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잘 썼는지도 몰라. 그때는 지금처럼 마른걸레 쥐어짜듯 억지로 쓰지 않았다고. 오히려 생각이 흘러넘쳐서 그걸 다 담을 수 없는 정도였지. 당신도 그렇잖아. 내가 요즘 쓰는 것보다 예전에 쓴 걸 더 좋아하지 않아?”
의도치 않게 흘러나온 자기 고백적인 말에 나는 움찔했다. 내 속에 나도 모르게 뒤틀려져 있던 부분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퇴보하고 있지 않나? 무언가 순수한 불꽃을 잃고 시시껄렁한 껍데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_본문 61쪽
‘나’는 여정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여성,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마주한다. ‘R’과의 관계는 애정과 갈등, 친밀함과 균열을 동시에 보여주며, ‘나’는 그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작품은 삶과 관계의 불안정성, 예술가로서의 자기 회의, 나이 듦의 체감, 그리고 일상 속에서 스치는 장소와 순간들이 남기는 잔상을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장으로 포착한다.
“민망한 향수조차 없이 잔인했던 좌절의 기억”
조용히 긴 파문을 남긴 상처의 잔해
세 번째 소설 「조용하고 먼」은 과거 대학 시절의 사건을 매개로 다시 얽히게 된 두 인물-윤경과 승혜-의 통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졸업작품 과정에서 벌어진 표절 사건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현재를 규정한다.
승혜는 자신의 아이가 윤경과 같은 잘못(표절)을 저질렀다며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온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억과 상처, 억울함과 후회를 되짚으며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질문을 끝없이 주고받지만, 결국은 인생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 속죄 그리고 끝내 해소되지 않는 갈등을 드러낸다.
내가 그 작품을 안다고 얘기했을 때, 그때 봤던 너의 표정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런 장면은 평생 잊을 수가 없지.
…….
너는 부인했어. 너는 모른다고 되풀이해서 말했어. 지금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니?
이미 다 인정했잖아. 합당한 처벌도 받았으니까 다 끝난 얘기야.
넌 정말 가벼워졌구나.
아니, 나는 사라지고 싶었어. 아주 오랫동안. 죽은 듯이 지냈어. 그게 지금의 나야. _본문 118-119쪽
소설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과거의 그림자와 현재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관계의 균열, 예술가의 윤리 그리고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실수를 섬세한 시각으로 탐구하여 조용하지만 멀리까지 파문을 남기는 이야기로 그려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