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한번 비어버린 자리는,
지키는 사람이 없으면 금방 허물어지고 마는 거야.”
태어날 때부터 줄곧 빛이 들지 않는 그늘에서 자라온 ‘시진’은 특별한 직업이나 고정 수입 없이 본사에서 지급하는 기본 페이에 기대어 살아가는 수급자, 일명 ‘뱅커’이다. 뱅커 페이만으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그는 친구 ‘제레미’와 함께 암석사막의 야생 흑각을 불법 채취해 납품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이들이 사는 세계는 지상과 지하로 나뉘어 있고 공중도시 라뎀(Lathem)의 철저한 감시와 통제하에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면역인인 제레미는 공중도시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지만, 왜인지 시진은 그늘을 떠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7년 전 행방불명이 된 누나 ‘유진’의 소식만을 기다릴 뿐이다. 집안의 유일한 ‘각인’이었던 시진의 누나는 머리 위로 각뿔이 돋아날 때마다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만 했고, 시진은 그런 누나의 고통을 잠시나마 덜어주기 위해 열 살 때부터 암석사막으로 나가 흑각을 구해와야만 했다. 세상에 둘만 남게 된 남매는 서로를 그 누구보다 아끼지만 ‘각인’과 ‘면역인’이라는 차이를 좁히지 못한 채 유진이 사라지는 날까지도 이해가 아닌 오해만을 쌓게 된다.
평범했던 시진의 일상은 이웃이자 친구였던 ‘베르트’가 각인 혐오자에게 살해를 당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게 된다. 시진은 친구의 사망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24시간 내내 햇볕이 들지 않는 코어로 향하고 그곳에서 베르트가 커터(각인의 뿔을 잘라내거나 치료하는 사람)를 찾아갔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진은 ‘메메’‘줄라이’ 등 수십 가지의 이름으로 불리는 커터와 그의 수제자인 추락천사 ‘데인’을 만나 세공한 뿔을 의뢰인에게 전달해주는 일을 시작한다. 시진이 친구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코어와 그늘을 넘나드는 사이, 다섯 명의 각인을 살해한 범인이 구치소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 감염으로 사망하면서 사건은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본사는 유사한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이 모든 것이 각인과 커터의 소행이라 발표하면서 사람들의 갈등을 부추겨왔고, 시민 안전을 빌미로 흑각 수급을 통제해왔다. 더는 흑각을 구할 수 없게 된 각인들이 고통 속에 병들어가는 와중에 자치 도시 포르틴의 수장 ‘필’이라는 의문의 인물이 엘시노어 서점에서 89년 만에 커터들의 회담, 빅 테이블을 개최한다. 시진은 그곳에서 예기치 못한 인물과 맞닥뜨리고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외로움을 지닌 ‘라티오’에게 우정과 측은지심을 느끼게 된다. 시진과 데인 그리고 라티오는 산산이 조각난 세계에서 진정한 모험은 소중한 이들을 지키는 것임을 깨달으면서 암흑 속에 갇혀 있던 비밀들을 하나씩 파헤치게 된다.
연여름의 소설은 주권을 빼앗긴 도시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인물의 부재를 통해 누군가가 이곳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더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삶의 가치들을 조명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에 관해 말한다. 모든 게 끝난 후 라티오는 시진에게 “내가 모르는 세상으로 이어지는 지평선을 보며 오래 걸어보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곳을 향해 멀리 걸어가서 돌아오고 싶다는 바람은 누군가에게는 평범하게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매일같이 생사를 다투는 이들에게는 꿈에서나 가능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작가가 작품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도서의 목록 대부분이 팔레스타인 사태를 다루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타인의 무관심 속에 무참히 죽어가는 이들이 있고, 소설은 참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다. 살아 있다는 선명한 감각을 불러일으키며 그 어떤 삶과 죽음도 헛될 수 없다는 믿음 아래 이 책, 『각의 도시』는 모두를 간절히 살리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다. 이 소설을 읽는 당신은 지금 어디서 누구와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