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의 원형--- 노래를 향한 열정
고승철/ 소설가
〈리전 글리클럽〉은 명작소설이 대체로 지니는 3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었다. 흥미, 감동, 교양.
처음부터 끝까지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의 물결이 끊임없이 흘러 읽는 재미를 제공한다. 여러 작중 인물들은 저마다 대체 불가의 캐릭터 매력을 내뿜는다. 합창단을 지키려 분투하는 주인공 박에스더, 15세에 미국으로 의학 공부를 하러 간 천재 소녀 박말련(메리언), 천재 음악가 안치용, 한국 민요의 가치를 알아본 미국인 음악 교수 메리 영, 박말련을 마돈나로 사모하는 일본인 영문학자 요시다... 무대도 경성(서울), 북간도,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등으로 국제적으로 펼쳐져 웅대한 스케일이다.
엄혹한 일제강점기에 민족 얼이 담긴 민요를 합창 공연 레퍼토리에 넣으려 사투를 벌이는 박에스더는 유관순 열사와 이화학당 동기생이다. 친구의 애국심과 리더십을 상기하며 합창단을 이끈다. 일본 경찰, 교목, 구체제 학부모 등 온갖 장애 요인들을 극복해 가는 박에스더의 집념은 독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3.1운동, 만주사변 등의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깔아 근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인데도 대하소설 분위기를 풍긴다.
요즘 지구촌을 휩쓸고 있는 ‘케데몬’ 열풍의 뿌리가 100년 전 리전(梨專) 글리클럽(Glee Club)의 열정이 아닐까. 합창단원들이 모여 노래를 만들고 연습하고 공연하는 모습이 오늘날 K-팝 뮤지션의 활동상과 비슷하다.
필자는 2024년 12월 16일 서울 여의도 영산아트홀에서 열린 아르모니아 합창단 공연을 관람했다. 이화여대 졸업생으로 구성된 이 합창단의 단원으로 무대에 선 양선희 소설가를 봤다. 100년 전 합창곡을 재현하는 역사적인 음악회 현장이었다. 소설 〈리전 글리클럽〉엔 합창단 활동이 실감 나게 묘사되는데 저자의 체험에서 비롯되었을 터이다.
이 작품은 역사소설이어서 사실(史實)에 바탕을 두었지만 ‘소설’이기에 픽션이 가미되어 있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거대한 그릇이어서 팩트와 픽션을 모두 담을 수 있다. 팩트와 픽션은 그 그릇 안에서 화학적 결합을 하여 미학적 가치를 지닌 새로운 생명체로 탄생한다. 역사소설을 두고 사실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하면 문학의 의미를 모르는 소치이다. 명작소설은 때때로 역사 기술(記述)을 뛰어넘는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만큼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사건을 핍진하게 묘사한 역사서가 있는가.
〈리전 글리클럽〉의 독자로서 팩트와 픽션을 판별하며 읽는 과정도 흥미로웠다. 메리 영 선생님은 실존 인물이지만 안치용 교수는 가공인물로 아마 월북 작곡가 안기영(1900~1980)이 모델인 듯하다. 메리 영은 미국 캔자스 베이커 음대를 졸업하고 1919~1940년 이화에 봉직하면서 기악, 음악이론, 작곡을 가르쳤다. 안기영은 1928년 미국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귀국해 1932년까지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활동하며 합창단을 이끌었다.
1886년 개교한 이화학당은 1925년 전문학교로 개편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음악과를 설치했다. 그러니 2025년은 이화여대 음악대학 설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지난 5월 2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이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렸다. 두 번째 프로그램은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튼 여사의 헌신적인 행적을 담은 소리극 ‘교육의 불꽃’이었는데 한복을 입은 출연자 6명의 모습에서 리전 글리클럽 합창단원이 연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