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우리가 마침내 따라잡은 시간이고,
비로소 해독하게 된 예언이다”
나는 문학을 ‘뒤늦게 도착한 편지’라는 메타포로 이해한다. 문학이란 태생적으로 지연되어 당도하는 속성이 있으며, 그러나 끝내 도달하는 것이고, 봉투 안에는 뭔가가 들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듀나를 이해하려면 이 메타포는 이렇게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듀나는 너무 이르게 도착한 편지라고. 너무나 탁월한 이 편지가 우리에게 너무나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우리는 그것을 제대로 펴보지도 읽어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다.
-문지혁 발문, 「너무 일찍 도착한 편지」에서
듀나의 소설에는 자연스럽게 덧붙는 수사들이 있다. 디스토피아적 상상력, 고전문학과 예술에 대한 해박한 지식, 음악이나 영화 등 대중문화와의 접점, 사회 비판적 성격과 젠더 의식, 판타지와 미스터리, 호러와 로맨스를 아우르는 다양한 장르적 접근, 인간-기계-포스트휴먼 담론 등이 그것이다. 『태평양 횡단 특급』은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듀나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며, 인간중심주의적 속박에서 벗어나 암울하지 않고 비극적이지도 않은 인간의 몰락을 보여준다.
2002년으로 돌아가 말년 병장 시절, 휴가 중에 북카페에서 『태평양 횡단 특급』을 단숨에 읽어 내려가며 느꼈던 충격과 전율을 생생하게 전하며 이번 책의 발문을 시작한 작가 문지혁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압도적인 이 책에 대해 “그저 읽어볼 만한 책이 아니”며, “‘한국 SF’라는 말을 어색한 표현이나 형용모순으로 느끼지 않는 다음 세대의 새로운 독자들에게 기꺼이 내어줄 책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역설한다.
수록작들을 간략히 살펴보면 이러하다. 태평양 해상에 깔린 철도를 달리는 국제선 기차 위에서 가문을 이어 대대로 평생을 살아온 주인공의 이야기인 표제작 「태평양 횡단 특급」은 남다른 스케일로 단편소설이 지닌 구조적-시공간적 한계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히즈 올 댓」은 문화적 편식으로 미국의 하이틴 무비들만 보며 자란 ‘히말라야산맥 근방의 소국’ 출신 소년이 그 문화적 지식을 기반으로 미국의 할리우드와 오프브로드웨이를 경험하는 이야기인데, 초판 ‘작가의 말’에서 “할리우드 하이틴 로맨스 영화들에 대한 나의 불건전한 애정을 폭로한다”라고 밝힌 것처럼 듀나 특유의 대중문화 코드가 아낌없이 들어가 시간과 공간을 종횡무진하며 사실과 허구를 거침없이 뒤섞는다. 채팅 유저들의 증오의 대상을 대신 죽여주는 살인자를 막을 것인가, 이 상황을 즐길 것인가 고민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따라가는 「대리 살인자」와 카프카적 상상력으로 자신에게 고통을 준 이들을 사냥하는 이야기 「허깨비 사냥」은 복수에 대해 다른 방식의 사고를 요청한다. 한편 어린 여자아이 로봇을 사랑하게 된 중년 여성의 고민과 갈등을 담은 「첼로」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A.I.와의 관계, 즉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미묘하고 모순적인 감정과 감각을 다루고 있다. 디스토피아를 표방하는 미래 도시의 이야기 「기생」은 인간과 기계 사이의 관계 역전을 보여주면서, ‘인간적’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담담하게 던진다. 이 밖에도 유전 공학 기법 중 하나인 클로닝을 소재로 씌어진 「무궁동」과 작가가 자신이 “처음 쓴 ‘귀신 들린 집’ 이야기”라고 소개한 「스퀘어 댄스」, 기계에 의해 인간 의지가 조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꼭두각시들」,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간 여행을 다룬 두 편 「끈」과 「얼어붙은 삶」, 상상을 현실에 투영할 수 있는 한 소녀를 중심으로 결국 그 거대한 상상 앞에 세상이 잠식되고 완전한 판타지가 되어버린 현실을 그린 「미치광이 하늘」까지, 그야말로 듀나 스페이스로의 초대라 할 수 있는 한국 SF의 명작이 긴 시간의 터널을 지나 다시 독자들 앞에 나왔다. 듀나의 오랜 팬들은 물론, 새롭게 듀나의 세계를 맞이할 독자들에게도 행복한 여정이 될 것이 분명한 듀나의 SF 횡단 특급 열차가 다시 운행을 시작한다. 기꺼이 탑승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