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들
책을 여는 첫 번째 시 「그 밖에」는 여섯 시인의 시 조각들을 쪽모이해 지었다. 시인마다 구별된 폰트로 시구를 조판한 이 시는 ‘한 편’의 시라는 단일성의 틀 안에 존재하기를 기꺼이 거절하는 듯하다. “메아리조각은 메아리를 발명하려는 시도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행한다. 구성원들 간의 차이를 조금이라도 좁혀 조화를 지향하려는 시도는 개입되지 않는다.”는 팀의 지향점이 은연중에 드러난다. 그러나 이 비(非)조화는, 부조화가 아니다. 조각들의 부딪침은 보이지 않는 메아리를 지면에 발생시킨다. 이 저변의 울림은 조화의 박음질로 작용해 나간다.
퀼트 시를 지나면 여섯 명의 시인이 각자의 ‘그 밖에’를 통로 삼아 집필한 열두 편의 시가 이어진다. 쓰인 후에 낭독이 결정되는 일반적인 사례와 달리, 이국에서 시인의 몸을 통해 잠시 소리로 존재하게 될 운명이 결정지어진 채 쓰인 이 시편들을 활자로 미리 구출한 ‘그 밖에’의 조각 채록집이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독자는 이들의 시가 ‘시’라는 영지에 접합되어 이미 존재해 왔음을, 서로가 서로의 언어를 포옹하고 있는 ‘한편’의 작품임을 체험하게 된다.
시가 수록된 지면은 퍼포먼스에서 텍스트 스코어로 활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청중의 최소한의 이해를 돕고자 영문 번역본을 함께 실었다.
메아리들
「그 밖에-베를린-메아리조각-몸-시-소리」는 메아리조각 팀원이 각자 맡은 단어를 쥐고 집필한 긴말을 한 줄기로 엮은 한 편의 산문이다. 임솔아는 ‘그 밖에’에 대한 사적 정의를 발견하고 퍼포먼스를 통한 회복 수기를 들려준다. 하미나는 퍼포먼스 장소로 예정한 ‘베를린’이 가진 언어의 상징성을 서술한다. 팀의 의도를 정의하며 시작되는 김소연의 글은 ‘메아리조각’이 구성원을 모으는 이름인 동시에 시의 또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한다. 김리윤은 ‘몸’을 말뚝 삼아 시적 행위의 비가시적 동선을 지시하고, 김선오는 다듬어진 언어를 다시 비언어로 돌려주는 방식을 제안하며 ‘시’의 회복 가능성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이제니는 여섯 시인 각자의 ‘소리’가 깊은 메아리가 되고, 이 메아리들이 다른 존재에게까지 가닿을 수 있음을 그려 낸다.
“우리는 서로를 흔들어 깨워 / 바깥으로 나간다”
이 책의 문장들은 서로를 의도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명하고 메아리를 만들어 낸다. 부록으로 수록한 김뉘연의 「들림」 또한 마찬가지이다. “불림은 들림을 기다린다.”는 문장과 함께, 이 글은 “쓰기”로 멈춘 활자를 불러내어 드러나는 “음성 사이 공간”을 감각하며 흐른다. 메아리조각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으나, 독서 과정에서 앞선 시와 산문의 문장 조각들을 떠올리게 하며, 문자와 행위 사이의 점선을 읽어 내는 지표로 작용한다. 더 나아가 “쓰기-읽기-듣기”의 의미를 “쓰기-읽기-듣기-쓰기”로, ‘그 밖에’의 또 다른 가능성으로의 감각 확장을 예감한다.
『그 밖에』는 하나의 반향실로 기능한다. 책을 초과한 감각이 독자에게 흘러든다. 각자의 밀실에서 또 다른 조각이, 부딪침이, 공명이, 울림이 일어나는 순간, 독자는 이 책이 자신의 ‘메아리조각’까지 포괄한 한 권의 펼침화음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