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동 korea
이곳에서 나는 뇌 집도의고 악몽 해부의고 시간 부검의다
- 「개안수술집도록 - 집도 제(-)32」에서
함기석 시인의 ‘무한 공간’이 수평과 수직, 양과 음, 영과 무한을 향해 끝없이 열린 좌표라면, 『개안수술집도록』은 ‘한국’이라는 수식에 ‘죽음’을 입력값으로 넣어 도출한 결과 그래프 같다. 그래프 방향에 따라 구분된 다섯 개의 부 이름은 ‘병동 k’, ‘병동 o’, ‘병동 r’, ‘병동 e’, ‘병동 a’, 즉 병동 ‘korea’를 의미한다. 병동에는 제목이 모두 같은 시 ‘개안수술집도록’ 53편이 부검대 위의 사체처럼 놓여 있다. 하나의 시마다 하나의 죽음이 있고, 그 죽음의 이전과 이후를 보여 주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시의 제목은 ‘부검 보고서’가 아닌 ‘개안수술집도록(開眼手術執刀錄)’ 말 그대로 ‘눈을 열기 위한 수술의 기록’이다. 즉 죽음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사체는, 우리는 눈을 뜰 수 있을까? 눈을 뜬 후에는 무엇을 보게 될까? 시인은 어떤 연역도 가설도 없이 오직 눈앞에 놓인 단서를 따라가는 귀납의 방식으로, 죽음의 근원과 소생의 근거를 추적하며 이 실험을 완수한다.
■ 병리적 징후의 바이털사인
빨간 사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빨간 사과라는 이름의 법의학 물체, 부패할수록 점점 선명해지는 냄새 환해질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사건
- 「개안수술집도록 - 집도 제32」에서
『개안수술집도록』의 시 53편은 오직 숫자로 구분되어 있다. ‘병동 k’의 시가 ‘집도 제23’부터 ‘제40’까지 차례대로 플러스를 향한다면, ‘병동 o’와 ‘병동 r’은 ‘제(-)1’부터 ‘제(-)33’까지 마이너스로 나아간다. 일정한 리듬으로 0에 수렴하며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오가는 정상적인 바이털사인과 달리 『개안수술집도록』의 그래프는 양극단의 직선으로 병리적 징후를 뚜렷이 보인다.
플러스를 향하는 ‘병동 k’에서는 사건이 시작된다. 사건의 범주는 개인과 사회를 넘나든다. 동침한 와이프는 칼이 되어 남편의 잠을 생선회처럼 저미고, 영국 외신 기자는 명동 지하도에서 살해당하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한 혈맹단원은 미국과 소련의 발톱을 응시한다. 마이너스를 시작하는 ‘병동 o’의 첫 시 ‘제(-)1’은 이곳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 반드시 일어나는 부조리 병원”이라고 선언한다. ‘없는 방’에서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어간을 잃은 어미 ‘한다’가 ‘없는 행위’를 한다. 이어 더 깊은 마이너스로 향하는 ‘병동 r’은 사건 이후의 사건 현장, ‘자아’로부터 멀어지는 ‘비아(非我)’의 기록이다. 이처럼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분절된 선을 그린 병동 ‘k’, ‘o’, ‘r’을 지나 ‘병동 e’와 ‘a’에 이르면, 기준점 0에 도달한다. 즉 죽음이다.
■ 동시성 세계 탐구 프로젝트
행간 기차를 탈선시킬 것. 글자 간 간격도 없앨 것. 시간의 손목과 목을 동시에 잘라 극사실적으로 배열할 것. (……) 무한개 장소고 무한개 구멍이다.
- 「개안수술집도록 - 집도 제0: 잉(~ing)의 동시성 세계 탐구 프로젝트 step. 01」에서
‘병동 e’와 ‘병동 a’는 각각 한 편의 장시로 ‘0’이라는 죽음의 상태를 보여 준다. ‘병동 e’는 좌표에서 시간 축을 제거한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동시성 세계 탐구 프로젝트’가 이루어지는데, 이 실험은 20개의 단계로, A부터 Z까지 총 26개 장소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사건을 ‘동시에’ 기록한다. 이 프로젝트는 쓰기의 기본적인 ‘형식’을 무너뜨린다. 물리적 행위로서 쓰기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라는 방향이 정해져 있고 그 방향에 따라 우선순위를 요구한다면, 함기석 시인은 쓰기의 형식을 무너뜨리며 동시다발적 사건들을 동시에 기입한다. 그러나 이러한 “극사실적”인 쓰기는 겹치고 겹친 글자들로 인해 결국 아무 내용도 전할 수 없는 ‘검정’이 된다. ‘병동 a’는 이 검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에 대한 탐구다. 시인은 ‘비평 유령 크롬’과 ‘청동 늑대’를 소환해 시를 읽고 쓰는 행위에 대한 탐구를 이어간다. 유령 ‘크롬’이 살아생전 읽은 시를 떠올리면, 무한의 눈을 가진 ‘청동 늑대’가 그 시를 읽는다. 한 편의 시는 그렇게 유한에서 무한으로 옮겨와 흩어지지 않는 좌표점이 된다. 죽음이라는 무한 공간에 새겨진 낯선 물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