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고통을 삶의 필수 조건이며 예술적 승화를 통해서 삶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그 고통을 이미지화해서 빛과 어둠의 스팩트럼으로 펼쳐놓으면 어둠 쪽에서 고통이 만져진다. 인간은 고통이 극에 달할 때 선택의 기로에 서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이 때 고통은 자아를 비추는 거울로서 메타인지 장치로서의 기능을 갖는다. 하지만 고통이라는 거울은 인간이 다양한 삶을 통해 직면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되어주지는 않는다. 특히 고통이 어둠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 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불확실성 속으로 빠져든다. 이 때의 어둠은 무채색에 가깝지만 사물이나 현실을 뚜렷이 드러내는 배경이 되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진리를 단순히 ‘사실’이 아니라 드러남, 즉 비은폐(unverborgenheit)로 보았다. 그런데 드러남은 항시 은폐를 동반한다. 은폐를 상징하는 어둠 역시 드러남을 위한 배경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심수자 시인의 시에 등장하는 고통의 서사나 어둠 이미지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통과 어둠의 서사, 또는 카이로스적 시간의 스팩트럼이 이 시집의 전반에 깔려 있다.
■ 인간의 삶을 사계절로 나누어 본다면 겨울은 죽음과 연관된, 삶이 마감을 기다리는 계절이다. 야스퍼스는 겨울을 생명의 힘이 약해지고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는 생명의 한계상황을 의미하는 은유로 본다. 하지만 겨울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이 움트는 봄 이미지를 내장하고 있으며, 삶의 혼탁과 불필요함을 비워내고 정화시켜주는 의미를 동반하기도 한다. 겨울은 자연이 활동을 멈추고 차가운 침묵 속으로 잠기는 시기이며 이러한 정지와 은폐를 통해서 유동상태에서는 제대로 감지할 수 없었던 존재를 오히려 선명하게 드러내주는 시간이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겨울이 일종의 카이로스적 시간임을 알 수 있다. 심수자 시인의 시에는 유독 겨울 이미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는 그의 삶이 질곡의 삶이었으리라는 짐작을 가능하게 해준다. 실존주의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가 겨울을 ‘한계상황’으로 명명했듯이 질곡의 삶은 인간으로 하여금 피할 수 없는 고통과 부자유를 느끼게 해준다. 이 때 인간은 질곡의 삶을 통하여 한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고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발견하기도 한다. 즉 겨울의 한계상황과, 봄과 희망의 서사로 읽히는 시들이다.
■태양에게 빛을 빌려 쓰는 달은 때때로 결핍의 상징으로 쓰인다. 달은 차고 기우는 변화를 통해서 풍부와 가난을 넘나드는 순환성을 보여준다. 그런가하면 달은 차갑고 멀리 있다는 점에서 냉철한 단절감을 통한 고통의 징표로도 읽힌다. 이런 관점에서 심수자의 시에 등장하는 달 이미지가 가난이나 고통의 서사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또한 달은 영혼의 깊은 영역을 비추는 초월적 거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전래동화 속에 나오는 달은 일종의 문토피아(moontopia)가 되어 토끼와 계수나무의 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달은 그 고유한 성격 안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달 이미지, 가난과 고통을 넘어서는 초월서사가 읽히며, 길 이미지와 삶의 존재론 차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찾고 있는 시집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길’은 단순한 이동통로나 교통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사유가 나아가는 방향이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유의 길’은 고정된 진리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 해석하며 나아가는 과정이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을 존재론적으로 바라본 철학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카뮈는 인생길이 지향하는 목적을 삶보다는 과정에 두고 있다. 심수자의 시들 중에는 길 이미지를 통해서 스스로의 삶을 탐색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시들이 보인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길 이미지는 철로, 물길, 허공 길, 꽃잎의 길, 하늘 길 등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