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가락의 자연스러움을 바탕으로 하는 『하루입디다』는 구르고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동태성(動態性)으로 충만하다. 이러한 시의 에너지는 ‘신명(神明)’과 ‘희열(Bliss)’의 경계를 넘나든다. 신명은 한국인의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독특한 정서이자 문화적 에너지로, 단순한 흥이나 즐거움을 넘어, 한(恨)과 같은 억압된 감정을 해소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는 역동적인 정신 상태를 의미한다. 이성적 논리를 초월하게 하는 신명은 개인적인 감정에서 시작되지만, 굿, 농악, 탈춤 등과 같은 공동체적 활동을 통해 집단 전체로 확산된다. ‘신바람’이라는 표현처럼, 한 사람이 일으킨 흥이 모두에게 전달되어 함께 어우러지는 사회적, 문화적 현상으로 나아감은 한국적 신명의 특징이다. 이후에 살펴보겠지만 불특정 다수의 청자를 대상으로 말 건넴과 청유형의 화법이 잦은 권애숙의 시는 분명 공동체적 신명과 관련한다. 신명이 한국인이 가진 “문화적 기호 체계”라는 면에서 그의 시는 형식뿐 아니라 내용 면에서도 전통을 탁월하게 계승한다.
권애숙 시의 밑바탕을 이루는 ‘주체의 고독’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주체가 ‘홀로 서 있음’으로써 갖추게 된 자존의식으로, 자신이 진정으로 온전한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데서 오는 깊은 만족감이다. 이는 자기 정체성과 이타성이라는 대립적이면서도 상호보완적인 원리에서 후자 쪽으로 기우는 시의 양상으로 입증된다.
시인은 “바닥이란 이름마저 까마득한 관념”(「읽지 않는 구역」)이라며 아무도 읽지 않는 구역을 주목하거나, “꽃의 울음을 바다의 이면에서 듣”(「시인의 말」)기 위해 귀 기울인다. ‘꽃’과 ‘바다’는 섬이라는 매개물이 불가피한 이질적 대상들이다. 전자의 울음을, 그것과 공간을 함께할 수 없는 후자의 이면에서 듣는 일이란 앞서, 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구역을 주목하는 행위와 통한다. 요컨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동감의 시적 가치를 실천하려는 노력은 말 건넴과 청유형 화법의 잦은 출현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함께 읽을 「곡신(谷神)의 편지」는 이타성 중에서도 모성을 본질로 하는 여성 신화적 모티프가 활달하게 운용된 작품으로, ‘식솔들’로 지칭하는 대상들에게 건네는 말 건넴의 화법이 두드러진다.
내 오늘 버선발로 골짝을 딛고 선다
적삼 앞섶 풀어놓고 작심하여 부르노니
어쩌다 여기까지 왔노 가깝거나 먼 식솔들아
피었다 지는 일도 얼었다 녹는 일도
건너편 뒤편마저 속절없이 꺾였더나
마라이, 미리 손 놓는 거 뒤척이는 계산 같은 거
물릴 곳 많겠다고 온몸에 단 젖꼭지들,
고픈 배 부르튼 발 뒤편까지 물려놓고
세상을 살려내는 건 엄마라는 장르잖아
골골마다 깊은 뿌리 마를 일은 없을 끼라
뒤집어쓴 어둠 털고 울음통 터뜨리며
새 생명 오시는 기척 새벽보다 더 붉어야지
- 「곡신(谷神)의 편지」 전문
인용 시는 시인이 즐겨 찾는 계곡의 형태와 노자의 도덕경 6장에서 착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노자는 비움을 설명하기 위해 계곡과 여성의 자궁을 비유로 든다. “谷神不死곡신불사 是謂玄牝시위현빈 玄牝之門 是謂天地根현빈지문 시위천지근 綿綿若存 用之不勤면면약존 용지불근” 즉 계곡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러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근원으로, 계곡이나 풀무, 바퀴통 등과 같이 존재의 본질로써 도의 세계가 가지는 비움과 무한성이다.
반면 권애숙 시의 ‘곡신’은 텅 비어서 무한한 충만이 아니라 꽉 차 있음으로써 저절로 흘러넘쳐 빈 곳을 채우고, 마른 것을 살려내는 충만이다. “고픈 배 부르튼 발”을 가진 대상들을 대하는 곡신은 “버선발로 골짝을 딛고” 서는 데서 우선 그 태도의 자발성과 적극성이 드러난다. ‘버선발로 뛰쳐나온다’란 상대방을 매우 반갑게 맞이하거나, 어떤 소식에 놀라 급하게 달려 나갈 때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이다. 이러한 화자이기에 그의 사랑과 연민은 “미리 손 놓는” 나약함이나 “뒤척이는 계산 같은” 손익계산과는 상관이 없다. “마라이”라는 방언은 ‘하지 말라’는 명령어이면서 이리저리 재는 태도를 혐오스러워하는 탄식이다. “가깝거나” 멂을 따지지 않고 저고리 “앞섶 풀어” 골고루 젖을 먹이는 곡신은 모성을 상징한다. “세상을 살려내는 건 엄마”다. “물릴 곳 많겠다고 온몸에 단 젖꼭지들”은 노자의 발상에서 차오르는 ‘물’의 상징성은 빌리되 자궁에서 유방으로의 신체 이동을 통해 흘러넘치는 동태적 현상을 새로이 부각한다. 노자의 곡신이 어떤 근원이나 토대를 연상시킨다면, 권애숙 시의 곡신은 품고 먹이고 자라게 하는 흐름과 운동 발생 이후의 이미지를 함의한다.
- 신상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