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에 섹스신은 사라지고,
관객의 음탕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에서 조명하고 있는 위시먼의 경향 중 하나로 위시먼의 ‘섹스 영화’에는 섹스가 없다는 것이다. 섹스의 부재는 이 책에 참여한 학자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는 이슈 중 하나이다. 예컨대 위시먼의 대표작 〈더블 에이전트 73〉에서 여성 스파이, ‘제인’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무려 73인치!) 맨 가슴을 드러내고 포획을 위해 범인들을 유혹한 후 침대로 끌어들이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섹스신은 생략되고, 기대할만한 에로티시즘은 공중으로 분해된다. 위시먼의 모든 영화에서 에로틱한 시퀀스가 등장할 만한 분위기에서는 반드시 의자 다리, 화분 등 전혀 상관없는 오브제들이 마치 정물화처럼 등장해서 관객들의 음탕한 기대를 산산히 부숴 놓는 식이다.
이러한 수법은 여성의 신체를 전시하는 방식에서도 비슷하게 발견된다. 위시먼의 영화에서 여성의 누드는 더 나은 시각화를 위해 파편화되거나 신화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영화들에 등장하는 여배우, 혹은 여성 캐릭터의 몸은 그저 평범한 (다소 풍만한) 몸집에 주름이 적당히 있는 일상의 육체일 뿐인 것이다. 이처럼 여성 누드의 대상화와 관음주의를 타파하는 방식의 (여성) 육체, 혹은 섹스의 재현 방식은 위시먼의 영화들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경향이다. 이는 동시에 섹스플로이테이션의 공식과 남성 시선의 (성인 영화) 제작 방식을 완전히 전복하는 그녀만의 고집스러운 전통이기도 했다.
위시먼의 카메라는 언제나 여성의 자리를 되찾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위시먼은 어쩌면 가장 역설적인, 즉 영화사에서 가장 남성중심적인 (창작자로서나 수용자로서) 섹스플로이테이션 산업에서 가장 여성주의적인 성인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참여 학자들은 척박한 땅, 섹스플로이테이션에서 그저 생존했던 여성 감독, 도리스 위시먼에서 나아가 그녀의 영화들이 어떤 방식과 기술적인 속임수로 여성 착취의 전통을 전복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기괴한 성적 재현으로 도출하는 전복적 에너지
위시먼 감독의 다각적인 탐구서를 한국어로 읽다
이 엄청나고 도발적인 책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은 어쩌면 앞서 공개된 서양의 독자들보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더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여성 육체에 대한 농담과 공격이 난무하면서도 성적 보수성을 고집하는 역설의 문화, 그곳이 바로 현재의 한국이다. 이 책은 한 여성 감독의 괴상한, 그러나 심오한 성인 영화들을 소개하고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육체와 섹스를 미디어가 다루는 방식의 역사, 그리고 그것에 대한 비판과 그에 맞선 동시대 여성들의 전복적인 시도 (도리스 위시먼, 스테파니 로스맨, 캐롤리 슈니만 등)를 설파한다.
원서의 저자 중 한 명이자, 번역가 몰리 김
이 책의 번역은 원서의 저자로도 참여했던 영화평론가 김효정(Molly Kim) 박사가 맡았다. 그녀는 한국의 호스티스 영화와 1970년대 검열법을 분석한 박사논문으로 시작해서, 첫 저서 『야한영화의 정치학』을 포함한 다수의 국·영문 학술서와 저서에서 영화의 성적 재현과 여성의 육체,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사회, 문화적 역학을 분석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번 번역서, 『도리스 위시먼의 영화들』은 아마도 그녀가 이제껏 발표했던 수많은 글 중에서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흥미로운 프로젝트로 남을 것이다. 동시에 이 책을 손에 든 한국의 독자에게도 도리스 위시먼의 작품세계가 담고 있는 기괴한 성적 재현과 그것이 도출하는 전복적 에너지는 결코 적지 않은 여운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