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담긴 한 또는 힘
이야기란 으레 ‘옛날옛적’부터 ‘할머니’가 들려준 것이다. 비단 한국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러했다. 비록 직접 들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옛이야기란 오래전 어느 할머니가 들려준 것이려니 여긴다. 그런데 ‘기록된 역사’의 세계로 진입하면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은 희미해진다. 그것은 여성이 아주 오랫동안 권력과 자본, 교육의 기회에서 밀려나 피지배자이자 약자, 희생자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여성이 후대에게 목소리를 전하는 방법은 문자가 아니라 음성과 기억이었을 것을 생각하면,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무척 의미심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어느 세계에서나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고 또 전해왔다는 증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쓰고 전한 이야기에는 여성 자신은 물론 소외된 존재들의 눈물과 웃음,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한 의문, 아직 만나지 못한 미래에 대한 꿈, 고단한 현실을 살아내는 힘이 필연적으로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비단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로 전해져, 세상의 큰 축을 이루었다.
『질긴 매듭』은 그러한 ‘이야기의 기원’에 무척 가깝다. 오늘의 여성 소설가들이 어떤 존재와 장면들을 눈여겨보고 있는지, 자신이 속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며 어떤 미래를 꿈꾸는지를 담고 있다. 여성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나 여성만을 위한 것은 아니며, 무엇보다 무척 흥미롭다. 아주 오랫 동안 수많은 인간이 어째서 여성들이 쓰고 전한 이야기를 그토록 즐겨왔는가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작품집이다.
‘모계 전승’된 것들에 대한 대담하고 다채로운 사유
『질긴 매듭』은 길상효 작가의 기획으로 배미주, 정보라, 길상효, 구한나리, 오정연 작가가 ‘모계 전승’이라는 화두를 깊이 파고든 결과물이다. 할머니의 옛이야기에 담겨 있었을 절박한 전승의 기원을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 사회가 ‘모성’에 겹겹이 덧씌워 온 강요에 대한 반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결심과 ‘나는 너다’라는 목소리까지. 다섯 명의 작가는 긴 세월을 거쳐 여성들을 억압하기도, 속박하기도, 연결하기도 한 무형의 것들에 대해 다양한 시각과 대담한 접근을 보여 준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모성’ 혹은 ‘모녀 관계’에 대해 사회가 덧씌운 환상에 대한 경계이다.
배미주 작가의 「이삭은 바람을 안고 걷는다」는 이상기후와 전쟁으로 전 세계에 죽음이 팽배한 근미래, 모래 폭풍으로 척박해진 땅 ‘연해주’를 배경으로 삼는다. 태아알콜스펙트럼장애와 불안장애를 가진 주인공 ‘이삭’은 엄마가 떠나버린 뒤, ‘도도 씨’의 도움으로 대형마트 ‘퀸즈패밀리’에 정착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규칙이 필요하고 조금 남다른’ 이삭은 그를 기다려주는 도도 씨 옆에서 일상을 꾸려간다. 그러나 도도 씨가 교통사고를 당하며 자신과 세상을 잇던 유일한 끈을 잃어버린다. 이삭은 과연 정착할 땅을 찾을 수 있을까? 분쟁 지역을 전전하던 이주 노동자이며,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고용주에게는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인력으로, 고객들에게는 투명인간으로 취급받는 이삭. 배미주 작가는 그를 통해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현대 사회가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이들의 존엄과 연대의 가치를 전한다.
「엄마의 마음」에서 주인공 ‘완’은 초경을 시작하자마자 나타난 친모로부터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저주’를 알게 된다. 첫딸이 딸을 낳아야만 어머니의 삶이 보장되니, 어서 딸을 낳아 자신을 살리라는 것. 그제까지 엄마로 알고 있던 사람이 이모라는 사실이나 막연한 미래의 일이던 ‘출산’을 강요받게 된 상황도 두려운데 친모가 등장한 이후부터 완의 눈에는 검고 흉측한 무언가와 그것의 비명소리까지 들려온다. 누구도 자신을 도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완은 이 저주의 사슬을 끊어내기로 결심한다. 완에게 찾아온 저주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몸이 되는 일’을 지나치게 신성하게 여기도록 가르쳐온 사회에 대한 비명이자 ‘여성이 여성을 낳는 일’을 저주처럼 여겨온 한국 사회를 향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하다. 환상이라는 장치를 통해 ‘호러보다 더한 현실’을 독자의 코앞에 들이미는 정보라 작가 특유의 필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이다.
장르도 주제도 다른 두 작품에서 독자는 근대의 많은 작품이 아주 신성한 것으로 여겨온 ‘모성’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과 대담한 결별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단순히 ‘어머니’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나에게로 이어진 속박을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겠다는 외침이다. 이는 ‘모성’ 혹은 ‘가족’을 지나치게 미화하며 사회가, 때로는 여성이 여성에게 강요해온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단호한 선언이다. 동시에 전통적인 가족을 뛰어넘는 새로운 연대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현재와 과거, 미래를 종횡하는 연대
「거짓말쟁이의 새벽」은 ‘원인불명의 통증’을 겪는 지효를 주인공으로 쌍둥이 자매인 지인, 그리고 자매의 어머니 은수와 이모 은조까지 두 세대에 걸친 자매 서사다. 의학적으로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통증으로 학교생활은 물론 주변 관계마저 엉망이 되어버린 지효에게는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믿어주는 지인과 어머니마저 부담스러울 뿐이다. 어느 날 가족과 연을 끊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이모 은조를 만나면서, 지효는 자신에게 찾아오는 고통에 어떤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구한나리 작가는 책에 실린 짧은 인터뷰를 통해 ‘자매’란 ‘고통을 이해하는 사이’라고 정의했다. 이 단편은 같은 고통을 경험한 두 세대의 친자매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고통받는 여성들에게 신체적으로 감응하는 지효의 능력은 우리 사회에서 연대하는 여성들이 서로를 부르는 이름인 ‘자매’를 떠올리게 한다. ‘나는 너다’라는 외침 앞에 망설임이 없었던 자매 연대에 대한 믿음이 밴 단편이다.
태고의 여신부터 천일야화의 세헤라자드, 조선 궁녀와 현대의 드라마 작가에 이르기까지 아주 오래전부터 여성들의 사연을 수집하고 꿈을 통해 전달하는 숙명을 타고난 여성들이 있다면 어떨까? 연인인 ‘미지’가 너무나 흔해서 단신감도 못 되는 귀갓길 여성 대상 폭력 사건으로 세상을 떠나자, 신문기자인 주인공 ‘영설’의 귓가에도 ‘오랜 일’을 수집해 건네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언어와 문자의 의미를 문학적으로 탐구해온 오정연 작가는 신작 「오랜 일」에서 다시 한번 ‘이야기의 의미’에 천착한다. 또 한편 지금 여성 대상 범죄와 그 범죄가 다루어지는 방식에 대한 작가의 문제의식 역시 이 작품을 이끄는 커다란 힘이다.
이 두 단편이 동시대 한국 여성들이 맞닥뜨린 폭력과 위험을 직시하고, 그로부터 여성들을 구원할 연대의 실마리를 찾는다면 길상효 작가의 SF 단편 「행성의 한때」는 지정 성별로서의 여성을 뛰어넘어 인류 전체에 보내는 경고다.
“종이 아니라 개체를 볼 것.” 「행성의 한때」는 그 수수께끼와 같은 문장을 치열하게 뒤쫓는다. 그 말은 진화생물학자인 ‘은서’의 연인 ‘해린’이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또한 해린의 할머니이자 같은 진화생물학자인 ‘김우경’ 박사가 심해 탐사 도중 일어난 사고로 모든 신체 기능을 잃은 뒤, 병원에 갇혀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되뇌는 말이기도 하다. 해린이 자신을 떠난 이후 자책과 분노와 원망을 거쳐 체념에 이른 은서는 어느 날 화성에서 보내온 한 장의 사진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해린은 어떤 비밀을 풀기 위해 그곳으로 갔을까? 이 작품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온 독자에게 ‘그 일방적인 흐름은 온당한가?’ 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일방적인 진화에서 ‘소수’라는 이유로 잊히는 생명, 혹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가차없이 지워 버리는 생명들을 기억하게 하는 시도다.
『질긴 매듭』에 수록된 다섯 단편소설은 앉은 자리에서 독자를 아득한 과거와 깊은 바다 밑, 아주 먼 미래로 데려가며 나와 같기도 다르기도 한 수많은 ‘종’을 만나도록 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들에게 손을 내밀도록 한다.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며, 고통을 아는 자들이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