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성해도 있는 힘껏 달리는 명랑한 존재들
한없이 능청스럽고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밀의 세계
2018, 2020 SF어워드를 연이어 수상하며 한국 SF 문단에 돌풍을 일으킨 아밀. 2025년 첫 소설집 《로드킬》이 영국에서 번역 출간되며 데뷔작만으로 단번에 해외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신작 소설집 《멜론은 어쩌다》에는 경계를 허무는 대범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여덟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작가의 전작 《로드킬》이 환상과 디스토피아, 신화와 전설을 넘나들며 억압에 맞서는 소녀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너라는 이름의 숲》이 ‘아이돌’이라는 존재를 통해 여성, 퀴어, 환경이라는 동시대 의제를 드러냈다면, 《멜론은 어쩌다》는 위트로 중무장한 채 현실의 차별과 소외를 거울처럼 비춘다. 자신만의 가족을 찾아 한국을 떠나고 싶어하는 뱀파이어, 첫사랑에게 큰 상처를 받고 섹스 로봇과 연애를 연습하는 부치, 동성애가 당연한 세상에서 이성과 비밀 연애를 시작한 여성 등, 범상치 않지만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눈앞의 벽을 제각기 방식으로 훌쩍 뛰어넘는 모습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다.
“갓 씻어낸 제철 과일처럼 신선한 상상력과
곧 그 껍질을 저며낼 칼처럼 예리한 시선이 공존하는 이야기들,
마녀의 소설이 아닐 리 없다.” _박서련(소설가)
《멜론은 어쩌다》는 논쟁적인 소재를 성역 없이 다루며 경쾌한 리듬으로 힘 있게 서사를 이끌어간다. 인공지능이 탑재된 고기능 섹스 로봇, 유전자 조작으로 태어난 ‘모태 아이돌’ 등 비범한 설정은 대범한 상상력과 천연덕스러운 유머 덕에 생생하게 힘을 얻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기발함과 유희성에 머물지 않는다. 겉으로 유쾌해 보이는 이야기 속에 현실의 억압을 고발하는 묵직한 힘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는 퀴어이자 뱀파이어라는 이중의 소수자성을 지닌 인물 통해 현시대의 혐오를 포착하고,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은 신체적 조건과 성별, 인종에 따른 편견으로 좌절하는 동양인 여성 피아니스트의 모습을 담아낸다. 이렇듯 작품은 현실을 비틀고 겹치며 총천연색의 세상을 펼쳐 보이는 동시에 현실 사회의 문제를 정확하게 겨냥한다.
이주혜 작가의 말처럼 《멜론은 어쩌다》에서는 “레즈비언이자 뱀파이어인 친구를 사랑하는 일이 이상하지 않고, 인간보다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는 로봇이 익숙하며, 이성애자가 성소수자로 차별당하는 일이 예사”로 일어난다. 현실의 위계가 거꾸로 뒤집힌 자리에서 소설은 경쾌한 외피를 입고 우리가 직면해야 할 혐오의 목소리를 선명히 상기시킨다. 아밀이 펼쳐내는 ‘멜론의 세상’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단편 소개
〈나의 레즈비언 뱀파이어 친구〉
기영의 인생에서 미나는 유일한 레즈비언 친구이자 뱀파이어 친구였다.
두 가지 다 친구로서는 비범한 요소이겠지만,
기영에게는 전자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더 어려웠다.
〈어느 부치의 섹스 로봇 사용기〉
본인도 여자면서 여자의 마음이 너무 어려운 영민.
첫사랑에 실패한 뒤, 연애를 연습해보자는 심정으로 섹스 로봇을 렌털한다.
노력에 보상이라도 받은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여자와 연애를 시작하는데……
〈아이돌 하려고 태어난 애〉
근미래, 가장 이상적인 아이돌을 만들기 위해 유전자 편집을 활용하는 세상.
그렇게 태어난 아이돌은 대중에게는 선망의 대상이자,
‘유전자 편집 반대론자’들에게는 경멸과 타도의 대상이 된다.
〈노 어덜트 헤븐〉
성경 말씀은 과장이 아니었다.
오직 어린아이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를테면, 멜론같이 여리고 어리고 맑은 아이만이.
〈성별을 뛰어넘은 사랑〉
동성 간의 사랑이 평범하고 당연한 세상.
은아는 여자친구와 짧은 연애를 마친 직후,
기행을 벌이고 싶다는 마음으로 홧김에 혼성클럽에 발을 딛는다.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나윤.
손가락이 짧다는 신체적 한계에 부딪혀 좌절하던 중,
‘차원의 마녀’라는 점쟁이의 영업소에 들어가 기묘한 거래를 하게 된다.
〈인형 눈알 붙이기〉
가늘고 길게 살고 싶어 흑마법 사용을 꺼리는 마녀.
인형 눈알 붙이는 일로 근근이 먹고산다.
그러던 어느 날, 거부할 수 없는 솔깃한 의뢰가 들어온다.
〈야간 산책〉
짙은 꽃 냄새에 은은히 섞여 나던 피비린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아득한 기억 너머로,
한밤의 공원에서 이뤄진 신비로운 만남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