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애들은 모두 진짜 한국인이다
‘진짜’ 한국인이 도대체 뭐지?
주현은 얼마 전부터 승윤네 부모님의 호의로 대치동 학원 주말 강의를 들으러 다닌다. 학원가에 처음 가 본 주현은 아연실색하는데, “강의실 전체가 새하얀 애들로만 채워져 있었”(14면)기 때문이다. 대치동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은 대부분 아파트에 살고, 부모님은 사무실에서만 일한다. 주현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동네 애들은 모두 ‘진짜’ 한국인”(17면)처럼 보인다. 그들은 주현에게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직접 말을 걸어 오지 않는다.
한편 주현의 학교에는 대치동과 달리 이민 2세대 청소년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주현과 동갑인 ‘요한’도 그중 하나로, 대쪽 같은 성정의 주현과는 달리 목소리가 작고 소심하다. 요한을 챙기면서도 그를 ‘동남아’라 멸칭하는 승윤의 태도가 불편해진 주현이 항의해 보지만 본인 일도 아닌데 신경 끄라는 답이 돌아올 뿐이다. 게다가 대치동 학원 강의라는 특권을 맛보고 있는 이상 더는 승윤에게 불만을 표할 수도 없다.
“멀쩡한 이름 냅두고 동남아는 아니지.”
“아닐 게 뭐 있어. 야, 그러면 요한이 동남아지 유럽이냐?”
“노아는 그냥 정노아인데.”
(…)
“야 인마, 그렇게 부르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너도 남아시아 할래?” (42~43면)
승윤이 요한을 함부로 대하는 건 과거에 요한과 모종의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한의 잘잘못을 떠나, 수많은 특징 중 가장 손쉽게 공격할 수 있는 부분은 왜 그의 ‘존재’에 대한 것일까?
주현은 스리랑카 출신 어머니를 두었지만 본인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자신의 정체성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아왔다. 하지만 요한의 문제로 촉발된 낯선 감각이 사실 예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바로 초등학생 시절 승윤에게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진짜 너랑 똑같은 거 같아?”(20면)라는 말을 들었던 그 즈음부터.
내가 가만히 있으니까
너랑 똑같은 거 같아?
편치 않은 의문은 진로를 정해야 하는 고등학교 생활과 엮이며 점점 복잡해진다. 여느 학부모처럼 엄마는 주현이 의대에 가기를 바라지만 주현은 한국에서 의사 가운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다. 공과대학을 졸업해 대기업에 입사하는 미래도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주현의 성격이나 성적 때문이 아니라, ‘진짜’ 한국인들과 다르게 보이는 자신의 외모, 스스로 어디 출신인지 확신할 수 없는 혼란스러움 때문이다.
내가 한국이랑, 한국인들 각각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랑 화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까지도 텅 빈 기억의 일부다. 그 빈 구멍이 나한테 있다는 건 원래도 알았는데, 내 알맹이가 바로 그거라는 건 지금 새로 알았다. (76면)
자신을 알고 싶다는 욕망으로 주현은 문학 과제에서 스리랑카 내전을 다룬 소설 『말리의 일곱 개의 달』을 소재로 제안한다. 소설을 읽은 친구들은 주현을 스리랑카 내전 사령관인 프라바카란에 빗대어 ‘반군 사령관’이라 부르며 멋있다고 치켜세운다. 요한에게 꽂히는 ‘동남아’와 주현을 칭하는 ‘반군 사령관’은 본질적으로 다를까? 장난스러운 선망의 눈길을 받으면 받을수록 주현은 자신이 친구들과 다르다는 것을 체감할 뿐이다. 주현은 은근히 기뻐하면서도 수치스러운 마음을 느낀다.
정체성을 규정하지 못하는 주현에게 또 한 가지 거슬리는 점은 바로 스리랑카가 동남아시아가 아닌 남아시아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필리핀 사람, 필리핀 출신 어머니 밑에서 자랐고 필리핀에 친척이 있는 요한과 스리랑카 사람, 스리랑카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으로 이주한 뒤 스리랑카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 주현의 어머니, 그리고 한국에서만 살아온 주현을 한 묶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는 한국에서 ‘이주민’이라는 이름 아래 대충 뭉뚱그려진다. 조만간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이 활약할 거라고 승윤의 새아버지가 주현을 격려하듯이 말이다.
나한테 허락된 배역은 이것이고
내가 넘을 수 있는 선이 딱 여기까지라면
나는 무엇이 될까…….
캐리커처(caricature)란 일반적으로 얼굴을 그린 회화 작품을 칭하는 말로 보통의 회화 작품과 다르게 얼굴의 특정 부분이 익살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사람의 여러 가지 정체성을 설명할 때 우리는 다양한 마스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본인이 속한 공동체나 관계에 따라 마스크를 갈아 끼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주현이나 요한에게 주어진 것은 마스크가 아니라 캐리커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설명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마스크가 아닌 캐리커처를 가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딘가를 과장하거나 축소해야 하고, 때로는 오해와 편견에 끼워 맞춘 모습을 보여야 인정받는다. 그러는 사이 ‘있는 그대로의 나’는 무엇일지 고민할 여력은 사치가 된다.
단요는 『캐리커처』를 통해 편견을 깨부수자는 단순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 캐리커처를 갈아 끼우며 살아야 하는 이들이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주현과 요한은 단순한 피해자나 가해자, 혹은 수혜자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필요 없을 ‘존재에 대한 증명’을 계속해서 요구받는, 하지만 누구나처럼 고유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다. 미래로 향하는 길은 직시에서 시작한다. 외면해서는 안 될 사실이 우리 앞에 와 있는 지금, 『캐리커처』는 시끄럽고 복잡한 논의의 포문을 연다.
그래서 나는 당사자들을 위해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작가의 말」 중에서)
▶줄거리
‘주현’은 평범한 고등학생이다. ‘평범’하다기엔 어머니가 스리랑카 출신이고 한국인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주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인으로 살아왔다. 어느 날 어린 시절 동네 친구였던 ‘승윤’이 호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주현은 승윤과 다시 어울리게 된다. 어렸을 때 주현은 자신이 승윤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 은근히 승윤을 깔보곤 했는데, 상황은 달라져 있다. 승윤이 대치동으로 강의를 들으러 갈 때 주현과 동승하는 호의를 베풀기 때문에 승윤이 이주 배경 청소년 ‘요한’을 ‘동남아’라 멸시해도 주현은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못한다. 게다가 승윤이 점점 과도한 것을 요구해도 마냥 거부할 수 없는 상황. 마냥 참아 오던 주현이 승윤에게 크게 반발하며 아슬아슬한 관계에 균열이 생기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