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고래』의 첫 장면은 공민권을 회복한 허경욱이 21세기 벽두에 런던 트라팔가 광장에서 작은형 허경윤의 아들 허시우(영문학을 전공하는 유학생)와 조우하여 여행의 첫 걸음으로 ‘마르크스 묘소’를 찾아간 모습이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달포에 걸쳐 유럽 대륙을 거의 한 바퀴 돌게 되며, 삼촌이 조카에게 긴 여로의 틈틈이 삼형제의 젊은 날과 가족사에 대해 조곤조곤 이야기해준다. 종착지는 모월 모일 모시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이다. 거기서 허경욱이 단 한 번만 이라도 기필코 만나려는 불확실한 약속이 있다. 상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교관으로 큰형(허경민)의 아들이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허경욱이 자신의 어린 아들과 딸을 미래의 독자로 상정하여 노트에 적어 나가는 이 장편소설은 날줄과 씨줄을 선명히 드러낸다. 여로에서 허경욱이 허시우에게 들려주는 형식으로 서술하는 가족사가 소설의 날줄을 이룬다. 일제 말기부터 21세기 벽두까지가 시대적 배경이며, 공간적 주요 무대는 포항, 서울, 일본, 북한 등이다. 날줄의 서사(敍事)는 실화에 근거한 것이다. 소설의 씨줄은 허경욱과 허시우의 유럽 여로다. 허경욱의 예리한 시선이 21 세기에 막 들어선 유럽 여러 지역의 풍광과 사람살이 모습을 포착해 자신의 사상에 투영하고 해석한다. 씨줄은 작가의 창조적 인물이 직조한 것이다.
『붉은 고래』의 날줄을 이루는 실존의 허경민은 오래전 북한에서 숨을 거두었고, 실존의 허경욱은 십여 년 전 고향에서 눈을 감았다. 실존의 허경윤은 인생의 서산마루에서 고독하게 이 나라의 정치판을 내려다보며 더러는 글로써 일갈도 외치는 중이다. 세월이 묻어버린 그이들의 실제 발자국은 엔간히 이 소설에 찍혀 있는데, 특히 작가는 주인공이며 화자인 허경욱을 소설에서 역사의 법정으로 소환해놓았다. 분단과 이념이 가혹하게 지배하는 현실의 법정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십수 년 감옥살이를 감당한 뒤 가석방으로 풀려나왔던 허경욱, 그의 최후 진술과 최후 판결문을 경청한 뒤에도 작가는 그의 내면이 치열하게 추구한 ‘완전한 세상’과 인간적인 또 다른 가치를 놓치지 않으려는 더듬이를 곤두세웠다.
소설은 후반부에 이르러 허경욱의 ‘오래된 비밀들’을 털어놓는다. 어느 날 문득 평양 라디오 방송에 등장한 고향 친구 강석표의 목소리를 듣고 지도원의 만나보라는 권유를 거절하는 장면 (〈오래된 비밀: 아, 강석표〉, 평양 주석궁으로 초대돼 김일성과 대면하고 대동강 잉어찜을 대접 받으며 “적들이 두려워하는 훌륭한 빨갱이가 되라”는 격려를 받는 장면(〈오래된 비밀: 잉어찜과 빨갱이〉), 황해도 제철소의 구더기들이 바글바글한 화장실에도 걸린 ‘위대한 초상’ 앞에서 혼자 소변을 보는 동안 그 밑의 벽을 타고 기어오르는 구더기 몇 마리를 지켜보며 드디어 그 입술에 닿게 되기를 속으로 응원하는 장면(〈오래된 비밀: 구더기와 위대한 초상〉) 등이다.
지난 2004년 전 3권으로 처음 나온 뒤 2023년 가을부터 인터넷 문학매체 〈문학뉴스〉의 ‘다시 읽는 문제작’으로 연재하면서 20년 만에 다시 독자와 만나게 되었던 이 소설을 이번에 증보와
개정을 거쳐 두꺼운 단행본으로 묶은 이대환 작가는 이렇게 밝혔다.
“햇빛이 어둠을 걷어낸다. 이게 자연의 섭리다. 그러나 80년 전 광복의 햇빛이 만든 분단의 어둠은 그대로 한반도에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나는 남북을 종단하느라 멍투성이가 된 ‘붉은 고래’의 영혼에 이 책을 바치면서, 넘어설 경계도 없고 지켜설 경계도 없는 자유로운 바다를 맘껏 호흡하며 찬란하게 유영하는 그날을 기원한다.”
『붉은 고래』에 등장한 삼형제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말을 한마디씩 옮겨놓는다.
허경민_“내 가족이 들어간 북녘 조국으로 막내아우를 보내면서, 나는 이론과 현실의 변증법적 대화, 이념과 체험의 변증법적 대화라는 진지한 공부의 여로를 생각한다.”
허경민_“출마라는 새로운 출발 앞에서 나는 정치란 돈과 음모로 하는 것이라는 통념의 비문(碑文)을 고쳐 쓰는 일에 도전하고 싶다.”
허경욱_“평양에서는 나에게도 개인의 가치란 조직과 체제와 이념에 합목적적으로 사용될 때만 가치가 있을 뿐이라고 주입하던데, 과연 6·15선언에는 합목적적 함정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