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와 스콜라 철학 중심의 중세 철학 서술에 일대 혁신과 문제의식을 제공한 문제작!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도전적 글쓰기 자세인 다음과 같은 말을 표명함으로써 책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이 책은 스콜라주의에 대한 단일하고 경직된 개념에 대한 대안으로 구상되었다.” 이러한 언명은 우리에게 ‘중세 철학’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해 하나의 커다란 의문점을 던지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중세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한 스콜라 철학에 방점이 찍혀 있었으며, 그것은 시기적으로 13세기에 치우친 관점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인식 체계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세 철학의 대가였던 에티엔 질송(Étienne Gilson, 1884~1978)의 전통적 시각을 반영한다.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중심으로 중세 철학사를 서술한 프레더릭 코플스톤(Frederick Copleston, 1907~94) 역시 전통적 토마스주의를 대변한다.
1986년 독일에서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 이 책은 엄청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독일 대학의 가톨릭 신학부 소속 학자들로부터 그러했는데, 이는 다분히 저자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내려놓았다는 개인적 결단과도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출간 이후 40여 년 동안 독일을 비롯한 유럽어권에서 중세 철학 입문서로서 정평이 났으며, 어느덧 필독서로 자리 잡았다. 첫 출간 이래 3판까지 개정판을 펴낸 것을 보면, 이 책의 가치는 충분히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기별로 역사적 상황 소묘를 충분히 보여 줌으로써 각 철학자와 사유 세계를 생동감 있게 서술
제2판 서문에 잘 드러나 있듯이, 저자가 이 책에서 전하려는 것은 각 사상가의 실존과 전적으로 분리된 이론이나 또는 지극히 고상한 주제들도 본질적으로 시대와 환경에 따라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에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그는 중세의 사유를 추상적 사변으로만 취급하지 않고 항상 그것이 속해 있는 생활세계(Lebenswelt)를 함께 고려하면서 서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곧 해당 사상가와 철학적 경향이 어느 지방과 문화권에 속해 있는지와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특히 각 세기를 들어가는 입문 성격의 글을 보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함께 그려 보이고 있는데, 이는 얼핏 역사학에서의 아날학파의 시각과 영향을 접목했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그만큼 해당 철학자와 철학적 사조가 어떤 역사적 상황 아래에서 펼쳐졌는지를 선이해(先理解)할 수 있도록 보조 장치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아울러 저자는 중세 철학사 서술을 특이하게도 철학 사조와 학파, 지역별 구분이 아닌 연대 구분에 따라 철학자들을 소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앞서 세기별 입문 성격의 역사적 상황을 제시했다고 했는데, 저자는 이와 같이 100년 단위의 연대적 구분법을 가지고 바라볼 때, 중세의 가장 객관적인 모습이 드러난다고 본다. 자연스레 이 방법은 ‘황금기 스콜라 철학’이나 ‘후기 스콜라 철학’ 같은 가치 평가적 표현을 피하는 대신, 중세의 “지적 삶의 동시성을 명확히 보여 준다”라는 장점이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중세 철학자들을 대거 소개, 아울러 아랍 철학의 영향도 조명
1990년대 유럽 중세 철학계는 연구가 ‘세분화’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중세의 이른바 ‘위대한’ 철학자들에게만 주목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의 철학자들을 광범위하게 포함한 결과였다. 또한 이러한 연구는 각 철학자의 사상적 발전을 더 정확하게 규명하거나 일부 사상가를 ‘스콜라주의라는 일원화된 사상의 보편 개념의 압제’에서 해방하기도 했다. 그 결과 “오늘날 아무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단테를 토마스주의로 간주하지 않는다”라는 점이 분명하게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세분화 경향의 장점은 그동안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철학자들이 이 책에서는 대거 소개된다는 데에도 있다. 라이문두스 룰루스(라몬 유이), 프라이베르크의 디트리히, 생-푸르생의 기욤 뒤랑, 토머스 브래드워딘, 장 뷔리당 등은 중세 철학에 대한 기존의 편견을 깨기에 충분한 철학자들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중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이후 스콜라 철학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 수용에만 매몰되었다는 편견, 그리고 중세가 고대 철학적 사유의 차원으로 회귀하고자 했으나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는 고정관념도 무너뜨린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중세 철학사를 끝맺을 때에도 과감한 시도를 한다는 데 있는데, 제3부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니콜로 마키아벨리, 종교개혁, 그리고 마르틴 루터에 대한 장(章)들을 할애한 것은 이를 잘 보여 준다.
또한 그는 이슬람 철학과 유대 철학의 영향사적 측면도 고려해 상당한 페이지에 걸쳐 두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 학계와 독자들에게는 최근에서야 그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미 1980년대에 이와 같은 시각이 중세 철학사 서술에 반영되었다는 점은 우리 학계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다. 21세기 들어 서양의 중세 철학 연구가 ‘중세 아랍’에 그 중요성을 두고 있다는 점, 그리고 다양한 연구 성과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사실은 뒤처진 우리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국적으로 저자는 서양 중세 철학이 그동안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왔다는 데 대해 비판적 시각을 분명히 드러낸다. 즉 그는 13세기 토마스 철학의 중요성만큼이나 14세기와 15세기, 그러니까 근대 초기를 준비하는 시기의 중세 후기에 대해 더욱 더 그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책에서처럼 그가 이해하는 ‘중세 시대의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에서 시작해 (대략) 마키아벨리에서 끝나는 것이다.
학술적 글쓰기와 대중적 글쓰기의 조화 속에 중세 철학의 기반을 넓히는 데 큰 기여
중세 철학하면 왠지 어려울 것 같은 선입견이 독자들마다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대다수 독일 철학자들이 만연체 문장에다가 관념적인 개념어나 전문적 용어를 사용해 글을 전개하는 방식에서 탈피, 단문 위주에 쉽고 간결한 설명을 적용함으로써 문제의 핵심에 도달하는 데 용이하게 해 준다. 더욱이 그는 철학사 전개에서 ‘역사적 관점’이 갖는 중요성과 특장점을 십분 발휘해 철학사 서술과 그 이해가 고립된 채 이해되지 않게 하는 데 최대한 노력하고 있다. 철학적 주제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모든 장(章) 이해 가능하게 읽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지점에서다. 오늘날 중세의 철학적 사상이 다시 진지하게 다루어지고 철학적 논의에서 나름대로 존재감을 얻게 된 것도 그의 이러한 업적과 관련이 있다. 곧 전문적인 학술적 작업과 대중화 작업을 조화롭게 하면서도 문제의식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