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시대에 건네는 철학의 응답,
모든 존재의 공존은 ‘얽힘’의 지평에서만 가능하다
인간은 더 이상 세계의 주인이 아니다!
근대적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얽힘’의 사유
시대가 어긋났다. 산불은 삶의 터전을 삼키고, 기후 위기의 그림자는 일상에 균열을 내고 있다. 인공지능과 알고리즘이 여론을 지배하는 ‘알고크라시’가 현실이 된 지금, 인류세라 불리는 시대는 기후와 생태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마저 인간의 거대한 흔적에 흔들리고 있다. 기후 변화와 생태계 붕괴는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재의 일이지만, 우리는 어긋난 시대를 바로잡아야 할 운명 앞에서 정지된 채 서 있다.
『얽힘의 윤리와 정치철학』은 인간을 독립적 주체로 상정한 근대의 세계관을 넘어설 것을 요구한다. 철학자 박성진은 강과 바다, 나무와 미생물, 전기와 기계, 알고리즘까지 모든 존재가 얽혀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했음을 일깨운다. 얽힘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라 양자물리학, 행위자-네트워크 이론, 해러웨이와 브라이도티의 사유가 증언하는 실재이다. 이 새로운 형이상학은 근대의 환상을 걷어내고,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열어 갈 철학적 토대가 된다.
포스트휴머니즘 × 녹색 공화주의 × 신유물론
얽힘 속에서 만나는 새로운 철학의 가능성
『얽힘의 윤리와 정치철학』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존을 요청하는 포스트휴머니즘의 문제의식, 생태적 민주주의를 모색하는 녹색 공화주의의 비전, 그리고 물질과 사유의 관계를 다시 묻는 신유물론의 통찰을 한데 불러 모은다. 각각의 사유는 서로 다른 지평에서 출발했지만, 이 사상들 모두 ‘얽힘’이라는 현실 조건 속에서만 생존과 정의를 논할 수 있다고 본다. 저자는 이들 사유의 접점을 찾아내고 유기적으로 통합함으로써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적·윤리적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물론 이런 통합적 사유는 단순한 이론 조합에 그쳐선 안 된다. 도리어 이는 인류세라는 위기의 시대에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철학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포스트휴머니즘은 인간의 특권을 해체하고, 녹색 공화주의는 인간과 생태 공동체의 민주적 질서를 상상하며, 신유물론은 인간/비인간 그리고 정신/물질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따라서 얽힘 속에서 통합되는 이 사유들은 인류세라는 어둠을 건너게 하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인간을 넘어선 책임의 지평,
윤리의 새로운 조건을 사유하다
얽힘의 세계를 직시하는 순간, 우리는 윤리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쓸 수밖에 없다. 오늘날 기후 위기의 피해가 가장 취약한 공동체와 생명에게 먼저 집중되고 있는 현실은, 기존 윤리학이 담아내지 못한 불평등과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저자는 도덕적 행위자를 독립된 개인으로 보던 전통적 관점을 넘어 이를 얽힘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로 재개념화한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언제나 얽혀 있는 관계망을 통해 파급 효과를 낳으며, 그 결과는 인간 사회를 넘어 생태계 전체로, 나아가 미래 세대로까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윤리적 책임은 단순히 ‘인간 대 인간’의 관계를 넘어 ‘종 간 정의’와 ‘세대 간 정의’를 포괄해야 한다.
저자는 이런 관점을 토대로 새로운 윤리학의 틀을 모색한다.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적 사유를 바탕으로, 윤리는 인간의 예외성을 전제로 하지 않고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을 인식하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인공지능과 생명공학이 인간 존재의 경계를 흔드는 시대에, 얽힘의 윤리학은 기술을 단지 도구로 보지 않고 인간과 더불어 책임을 나눠서 지는 행위자로 본다. 나무와 강, 미생물과 기계, 데이터와 알고리즘까지도 윤리적 고려의 대상이 된다.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규정
‘인간을 넘어 모든 존재의 공존으로’
기존의 정치철학이 보지 못한 것은 얽혀 있는 수많은 존재들의 목소리였다. 민주주의는 더 이상 인간 사회만의 제도가 될 수 없으며, 비인간 존재들의 권리와 이해관계까지 반영해야 한다. 저자는 ‘인간 너머의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기후 위기와 기술 혁명의 시대에 정치적 대표성과 거버넌스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숲과 강, 동물과 기계, 인공지능과 데이터까지 정치적 주체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 책의 급진적 주장은 기존 정치철학의 경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특히 저자는 얽힘의 정치철학이 단순한 이론적 전환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임을 강조한다. 근대 정치가 개인의 소유와 주권을 중심으로 짜여 왔다면, 얽힘의 정치철학은 공유와 협력 그리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맺는 연대를 토대로 다시 짜여야 한다. 숲과 강, 동물과 기계, 인공지능과 데이터까지도 더 이상 배경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자이며, 그들의 권리와 이해를 고려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설득력을 잃는다. 이러한 전환은 곧 새로운 민주주의의 탄생이며, 정치는 얽힘 속에서 권력의 기술이 아닌 공존의 예술로 자리매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