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불어닥친 녹색 바람
시민의 삶 속으로 들어온 공원
1996년 6월, 서울시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공원 녹지확충 5개년계획’이 발표되었다. 첫 민선 시장이었던 조순 서울시장 시절, 저자는 그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현장을 뛰어다니던 실무 책임자였다. 그는 부서 간의 벽, 중앙정부와의 협의, 예산과 주민 민원, 설계 및 시공팀의 현장 조율까지, 공원을 조성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복잡한 과정을 성실하게 기록한다. 펜스의 재료와 색깔은 물론, 안내판 하나에도 도시의 품격과 시민의 시선을 고려했던 저자의 세심함은 성실한 공무원의 이미지를 넘어 공직자가 가져야 할 행정윤리와 공공디자인의 철학을 보여준다. 오늘날 서울이 ‘공원 도시’로 불릴 수 있게 된 데에는 이처럼 시민을 먼저 생각한 전문분야 공무원들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행정 전략이 빛을 발한
하늘공원과 노을공원
월드컵공원 일대는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대한 쓰레기 매립장이 있던 곳이다. 저자는 이 공간을 미래형 도시 숲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장기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1997년부터 시작된 이 사업은 서울시의 대규모 환경 복원 사업 중 하나로, 총 200만 제곱미터 규모의 초대형 공원을 만들어냈다. 노을공원과 하늘공원은 그 대표적 결과였다. 쓰레기 매립장이던 땅 위에 흙을 덮고, 가스를 제어하며 식생을 복원한 이 사례는 도시재생과 환경행정의 결합을 보여주는 모범이 되었다. 매년 많은 시민이 억새축제를 즐기러 오는 하늘공원은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고, 애초 골프장으로 계획되었으나 시민공원으로 거듭난 노을공원은 현재 이름 그대로 노을 명소로 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쓰레기 매립지에 대형공원 조성이 성사된 배경에는 인근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지어 국제대회를 개최한다는 정책적 판단도 한몫했다.
작지만 긴요한 소공원
빽빽한 도시에 숨을 틔우다
공원은 단순히 땅만 확보한다고 가능한 게 아니다. 저자는 시유지를 쉽게 매각하여 사업자금을 마련하곤 했던 당시의 관행에 맞서, 도시계획의 입안 시점부터 형식적인 녹지 대신 실제 공원으로 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다. 미집행 공원용지는 동네 뒷산의 공원화 사업을 위해 토지가를 보상해가며 주민 쉼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관련 부처, 구청, 설계 및 시공사, 시민단체와 협의하고, 때로는 예산을 직접 따내기 위해 고위 간부에게 “제가 벌어놓은 자금에서 투자해 달라”라고 고집하는 대담한 면모도 보였다. 체비지로 팔릴 뻔했던 토지들을 공원으로 전환하기 위해 쌈지 마당, 소공원, 마을마당과 같은 ‘작지만 긴요한 공원’을 제안하기도 했다. 저자는 이처럼 “출근길에 생각도 정리하고, 점심시간에 잠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공원의 기본이자 도시의 숨구멍으로 여겼다.
숲을 지키는 색은 뭐다?
비 맞은 나무껍질 색!
저자는 20여 년간 서울의 공원 안내 체계와 펜스의 형식과 색상을 개선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안내판의 글씨체, 배치, 색채, 재료까지 직접 현장을 다니며 개선안을 내놓았고, 그 중심에는 늘 ‘기와 진회색’이 있었다. 비 온 뒤 물기를 머금은 나무껍질을 닮은 이 색깔은 무광의 기와색으로, 자연과 충돌하지 않고 공간에 스며들어 숲을 더 돋보이게 한다. 숲을 감싸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감추며 자연을 드러내는 배려의 색이다. 공원에서 펜스가 튀지 않게, 안내판이 시야를 가리지 않게, 인공물보다 숲이 먼저 보이도록 저자는 세밀하게 조율했다. 오죽하면 동료들에게 ‘기와 진회색’이라는 별명을 얻었을까! 이러한 깨알 디테일 덕에 서울은 ‘사람이 대접받는 도시’로 진화할 수 있었다.
소신과 열정을 갖춘
휴머니스트 공무원의 글쓰기
녹지직 공무원의 고민과 시행착오, 그 현장에서 길어 올린 성찰을 담은 이 책은 지금 시민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공원의 존재가 얼마나 치열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인지 보여준다. 저자는 평소 해당 분야의 명장들을 꼼꼼히 기록한 수첩을 갖고 다니며 현장의 문제점을 즉석에서 자문받고 해결했다. 저자가 일궈낸 빛나는 성과 이면에는 토지주와의 소송, 한강 대홍수, 우면산 산사태, 맨홀뚜껑 사건, 각종 민원과 로비, 협박 등 온갖 시련과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책은 서울이라는 대도시가 멈출 줄 모르는 개발 논리 속에서도 어떻게 푸른 도시로 진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도시 숲의 연대기이다. 결코 녹록잖은 세월을 견디며 서울시 녹지 행정의 전설이라 불리게 되기까지, 저자 최광빈이 보여주는 삶의 궤적과 진솔한 글쓰기는 공공영역에 종사하는 분들은 물론, 일반 독자들에게도 깊은 울림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