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와 취향을 지긋이 내리누르는 공부
동무들을 ‘시간처럼’ 대접하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틈, 사잇길이다. 공부할 때도 대학이라는 제도권 안에서의 커리큘럼과 책을 멀리한 채 불교적 수행을 강조하는 마음공부의 사잇길을 저자는 권면한다. 모든 공부는 사실상 ‘공부론’을 내포하고 있는데 이 책은 응해서 말하는 수행성의 반복, 즉 사회적 복합성에 의의를 둔다. 친구가 아닌 동무라면 무엇보다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듣기로써 섬세한 비판적 감수성을 끊임없이 주고받는 것이야말로 친구로 추락하는 관계를 동무로 끌어올리는 생활정치다.
공부는 자기 내면에 골몰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란 개인의 심리와 취향을 지긋이 내리누르는 힘으로, 가능한 한 ‘마음’이 적은 게 좋다. 즉 자기 마음을 죽인 채 처해 있는 객관적 관계적 사태를 훑어내는 관찰력이 공부다. 저자는 “근대 이후의 똑똑함을 잃지 않으면서” 명랑하게 자기 골몰의 연쇄를 뚫어내 실천의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동무의 사귐은 위험한 것일 수밖에 없다. 체제의 한계와 바깥을 거닐며 전에 없던 관계를 만들어내야 하고, 그 관계를 재조정·재구성하면서 끊임없이 고쳐 말할 뿐 아니라 ‘고쳐 던지기’까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무 사이에는 상식, 도덕, 사사로운 정이 없다. 있는 것은 근본부터 교란하는 섭동이다. 섭동의 진원지는 나와 너다. 나는 동무들을 “시간처럼” 대접해야 한다(시간은 그 시간 속의 모든 존재를 마모시키고, 흔들면서 미망에서 해방시키는 모든 섭동의 근원이다).
동무관계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생산주의 사회에서 체계 내에 들어선 인간관계는 언제나 상처에 둔감하다. 반면 “동무는 무엇보다 상처의 속도를 무력화한”다. 지금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상처에 지속적으로 처방을 내리지 않는다면 그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근현대 철학사 역시 상처라는 프리즘을 통해 재서술될 수 있어야 한다.
공부와 동무의 원수는 타자성의 함몰
타자 속에 내던져지지 않은 글은 아직 글이 아니다
『동무론』은 580쪽에 걸쳐 동무와 연인, 호의와 신뢰, 약속-존재론, 산책과 자본주의 등의 논의를 전개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권한다. 벤야민처럼 인용으로 가거나, 아도르노처럼 부정의 변증법을 구사하거나, 레비나스처럼 타자성으로 가거나, 하버마스처럼 의사소통적 합리성으로 가더라도 중요한 것은 감정이입의 안이한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감정은 원천적으로 이입되지 않는다고 봐야 실천적으로 현명해지며, 그 이입을 알면서도 모른 체하는 가운데 신뢰의 싹은 튼다.
공부와 동무의 원수怨讐는 타자성의 함몰이다. 타자라는 역설의 공간 속, 동정同情과 이입이라는 몰이해의 공간 속으로 내던져졌을 때라야 글은 비로소 글이 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글쓰기에 따른 타자들의 불평 역시 내 글의 일부다. 내 글이 기존 텍스트들 속에 들어서는 순간 독자의 반응과 더불어 오해는 번성한다. 그렇지만 타자성으로 휩쓸려가보지 못한 글은 아직 글이 아니다. 삶이든 글이든 그 실력은 세속적 응답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타자를 향한 움직임을 훈련하는 데는 일상적 동선, 버릇, 연대, 극진함, 이 네 가지가 중요하다. 즉 자아의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실천할 때 동무관계는 만들어진다. 이때 ‘약속’이 존재론이 되는 것을 깊이 새겨야 한다. ‘미래에서 출몰하는 모든 사건을 잠재우면서 시간과 더불어 시간을 넘어가는 삶의 방식’이 바로 약속이라고 저자는 정의한다. 따라서 세속 속에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은 나를 통과하는 모든 미래에 대한 극진한 환대라 할 수 있고, 자아의 늪을 지나가려는 수행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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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초판은 2008년에 나왔고 2025년 출간된 것은 제3판이다. 그사이에 『동무론』을 잇는 주저는 『집중과 영혼』이었다. 『집중과 영혼』에서도 ‘동무론’은 다시 논해진다. 그는 출간 이후 10년을 되짚으면서 “동무론은 우선 그 현실적 위상을 이해시키고 개인의 생활양식과 연계시키는 게 중요했지만, 없는 길을 만드는 것은 청사진과 설명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다”며 중간 점검을 한다. 산기슭에 길을 하나 내는 데도 수백 년이 걸리건만, 여전히 친구와 연인, 가족만 번성하고 있는 사회에서 동무의 길을 만드는 것보다는 차라리 파국을 예감하는 게 쉬울 것이다.
따라서 에고를 깨고 비우고 넘어서려는 총체적 집중 속에서 자신을 ‘체제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는 삶의 양식’에 따른 제물로 삼음으로써 주변을 차분하게 정화할 때에만 결심과 의도에서 벗어나 몸에 들러붙어 있는 버릇들을 재배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