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__청각 장애 문장가 이덕수
이덕수(1673~1744)는 지금까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18세기 전반 대표적인 소론계 문장가이자 관료였다. 그는 8살 때 귓병을 앓은 뒤 청각 장애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독서에 힘써 수많은 책들을 읽었고, 박세당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덕수는 오히려 귀가 들리지 않아 독서에 전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조실록』 영조 20년(1744) 5월 28일에 의하면, “이덕수는 문장이 넓고 단아하여 일대의 종장으로 일컬었으며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문형(대제학)을 맡았다”고 나와 있다. 이규상의 『병세제언록』에서도 “이덕수의 문장은 기력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 이덕수의 집에는 묘도문(돌아가신 조상의 성명, 세계, 행적, 장례, 자손 등을 기록한 글)을 부탁하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덕수의 문집에 남아 있는 묘도문만 해도 모두 176편에 이른다.
이덕수는 늦은 나이에 관직에 나갔지만, 빠르게 높은 벼슬에 올랐다. 특히 그의 나이 51세가 되던 해 영조의 총애를 입어 경종실록 당상과 성균관 대사성, 좌참찬, 우참찬 등 수많은 관직을 역임했다. 이덕수는 귀가 들리지 않는 청각 장애인이었으나 영조는 개의치 않고 오직 능력만 중시하며 항상 그를 총애했다. 심지어 이덕수가 귀가 들리지 않는 병세 때문에 사직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임금이 말할 때마다 옆의 사람이 큰소리로 대신 전해주니 이덕수는 미안하여 사진을 요청했던 것인데, 임금이 상관없다며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특히 영조는 이덕수에게 질문할 것이 있으면 사관에게 글로 써서 보여주게 하는 등 후의가 두터웠다.
___목민심서에 나타난 정약용의 장애 복지론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이다. 특히 장애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다양한 장애인 복지론을 펼치는 한편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서도 생생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다산은 장애인은 노역, 군역, 잡역 등 모든 국역을 면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귀머거리나 고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으며, 장님은 점을 치고, 절름발이는 그물을 엮어서 살아갈 수 있지만, 기타 폐질자는 구휼해주어야 한다”고 하면서 장애 복지에 있어서 자립 생활의 원칙과 구제 정책을 적절히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람은 각기 맡은 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장애인의 경우도 소경은 음악, 절름발이는 대궐문 지키기, 심지어 곱사등이나 중증 장애인까지도 적당한 임무를 맡겨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의지할 데가 없는 장애인에게는 시정(활동지원사)을 제공하고, 의지할 곳이 없어 떠도는 사람에겐 동서대비원 같은 보호시설을 지어 머물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기본적으로 장애인도 직업을 갖고 제힘으로 먹고살도록 하되, 중증 장애의 경우 국가에서 직접 구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___홍대용의 자립적 장애 복지론
이용후생파는 18세기 후반 홍대용, 박지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호수와 서유구를 비롯한 달성서씨 집안 사람들을 중심으로 성립된 실학파를 말한다. 이들은 백성들이 빈곤을 극복하고 잘살기 위해선 상업을 진흥시키고, 수레나 배 등의 기술을 개발하며,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도 경세치용파처럼 시대를 앞서가는 선진적인 장애 복지론과 장애관을 갖고 있었으며, 장애 인물들과 신분 및 나이를 초월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홍대용(1731~1783)은 18세기 중반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였다. 그는 당시의 사회적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백성의 실생활에 쓸모 있는 이용후생학을 주장했다. 특히 중국의 선진문물과 서양의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했다. 홍대용은 장애 복지, 특히 직업과 노동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주장을 펼쳤다. 즉 장애인도 모두 일자리를 갖고 스스로 먹고살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홍대용은 “사람의 단점을 버리고 장점을 쓴다면 천하에 못쓸 재주가 없다”고 하면서, 시각 장애나 언어 장애, 지체 장애 등 장애인 모두 일자리를 갖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만 장애인이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남들도 그들을 무시하지 않고 정당하게 대우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장애 복지의 가장 현실적이고 핵심적인 방안이라고 볼 수 있다.
___조선 최고의 장애사상가, 박지원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이용후생파 실학자이자 조선 후기 최고의 문장가였다. 연암의 삶에서 가장 큰 특징은 폭넓은 교유 관계를 꼽을 수 있다. 연암은 한양 한복판 탑골에 살면서 신분과 나이, 빈부, 당파를 초월한 폭넓은 교유 관계를 맺었다. 특히 연암은 노론 명문가인 홍대용, 정철조 등은 물론 서얼 출신인 박제가, 유득공 등과 어울려 지냈다. 나아가 분뇨장수, 이야기꾼 등 하층만과도 격의 없이 지냈다. 이러한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인간관은 그의 장애관에도 영향을 미쳤다.
연암은 장애란 보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장애는 고정불변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입장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연암이 한밤중에 말을 타고 강을 건너가게 되니 위험한 상황이었다. 이에 통역관이 “옛날에 위험한 것을 말할 때 맹인이 애꾸눈의 말을 타고 한밤중에 깊은 연못가를 가는 것이라고 했는데, 정말 오늘밤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연암은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위험할 수도 있겠으나, 정말 위험을 잘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맹인을 보는 사람은 멀쩡하게 눈이 있는 사람들이다. 맹인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마음속으로 위태롭다고 느끼는 것일 뿐, 맹인 스스로는 위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맹인의 눈은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는데, 무슨 위험이 있단 말인가”라고 답했다. 즉, 장애 당사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결국 장애란 절대적인 것이 아닌 사람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또한 연암은 겉모습보단 내면, 즉 본질을 보라고 했다. 또한 장애를 에둘러 표현하지 말고 직설적으로 말하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예를 중시해 뭐든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완곡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어도 내면에는 해가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둘러대어 표현하는데, 이는 본질의 왜곡이자 과도한 친절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연암은 장애인 당사자도 장애에 구애받지 말고 살아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