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처럼 빛나는 사랑의 언어
-홍경흠의 시 세계
권온(문학평론가)
1.
홍경흠은 열정적인 사람이다. 체육을 전공하고 중등교사로서 40년 정도 근무한 그는 쉰이 넘은 나이에 시인으로서 등단하여 20년 넘게 치열하게 시작(詩作)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홍경흠은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하였고, 미국과 같은 해외에 작품이 소개된 국제적인 영향력이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은 그의 시 세계에서 새로운 터닝 포인트로서 기능할 수 있다.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전환점의 역할을 담당하는 이 시집에서 홍경흠이 주목하는 시적 주제는 노화(老化), 죽음, 집 등의 어휘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시인은 엄마, 아내, 친구 등 친밀한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를 심층적으로 탐색한다. 친애하는 독자들이여! 70년 이상의 세월을 강건하게 살아낸 이의 인생 노하우가 가득 담긴 독특한 시적 언어를 확인해 보자.
2.
병실 침대에서 몇 달째 웅크려 있다
오늘은 죽을까
내일은 살까
한겨울
눈이 두텁게 쌓인 산자락에
차디찬 백골로 눕기 싫었다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신(神)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었다
오늘 만큼은 착한 성도가 된다
-「기도」 전문
홍경흠의 시에는 독자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시의 배경에는 시인의 내밀한 체험이 위치한다. 홍겸흠은 여기에서 “병상 침대에서”의 “몇 달째” 경험을 매우 진솔한 언어로 형상화한다. 그는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죽음을 염려한다. 1연 2행의 “오늘은 죽을까”에는 죽음을 향한 염려나 두려움이 내재한다. 그러나 시인은 죽음의 낭떠러지로 추락하는 대신 삶을 향한 강한 의지를 피력한다. 우리는 1연 3행의 “내일은 살까”를 읽으며 미래를 향한 긍정성을 기대한다.
이 시의 2연에 등장하는 “한겨울”, “눈”, “백골” 등의 어휘는 인간에게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를 암시한다. 질병과 죽음은 인간에게 두려움의 정서를 제공한다. 그러한 두려움 앞에서 사람들은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신(神) 앞에/ 공손히 무릎을 꿇”게 되는데, 무신론자(無神論者)로서의 사람들을 “착한 성도”로서 변신하게 만들 만큼 죽음은 힘이 세다. 홍경흠의 이 시는 독자들에게 “공손히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북돋운다. 죽음 속에서 고민하는 오늘을 넘기면, 우리는 분명 내일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테다.
한 줌 재로 마침내 잊히게 될
나를 생각했다
정답과 오답을 오가는
한 생이 저물 무렵
볕바른 쪽이
정답일 때도 오답일 때도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어디선가 육신이 떠나버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아직은 올 때가 아니라고 하는 듯 했다
돌아설까 망설이다가
또 다른 환생을 믿으며
묏자리를 샀다
수많은 봉분들과
덧없는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간 움켜쥔 용심을
슬며시 내려놓자
어린아이처럼 해맑아졌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은
내 마음은
어느새 0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묏자리」 전문
이 시에서 시적 화자 ‘나’가 주목하는 어휘에는 “묏자리”, “재”, “봉분들” 등이 있다. ‘나’가 집중하는 단어들은 공통적으로 ‘죽음’과 연결된다. ‘나’는 “한 줌 재로 마침내 잊히게 될”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고, “육신이 떠나버린 목소리”를 들었다.
‘나’가 “묏자리를” 산 이유는 “또 다른 환생을 믿”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봉분들”에 얽힌 “덧없는 세월”을 목도하면서, 자신에게도 “정답과 오답을 오가는/ 한 생”어 머무를 공간을 제공하기로 결심한다. 홍경흠에 의하면 인간은 ‘정답’과 ‘오답’ 사이에서 방황하고, ‘좌’와 ‘우’ 사이에서 흔들린다. 시인은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용심”을 “내려”놓고 “어린아이”와 같은 “해맑”음에 도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추구하는 “0시 방향”에서 타율적인 삶이 아닌 주체적인 삶의 뚜렷한 방향을 확인하게 된다.
아직 집이 없다니까
그동안 뭐하고 살았냐고 묻는다
머뭇거릴 사이도 없이
다들 농담이겠지 라고 한다
기나긴 엇박자 삶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빳빳이 쳐들었지만
아무리 떼어내도 따라붙은 무주택자
집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나는 늘
변명을 늘어놓았지
곧 큰돈이 들어올 거야
그래봤자 막힌 부분이
한순간에 뚫리는 것도 아니었다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어도
매번 기운차게 허세를 떨고 다녔지
내심 살려고 발버둥 쳤어도
바람만 누구에게나 공평할 뿐
모로 움츠러 누운 밤이면
놓치고 없는 것들을
빈손에 꽉 쥐고 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밤이 적막하다
-「집이라는 말에」 전문
한국인에게 “집”은 비바람 따위를 막고 그 속에 들어 살기 위하여 지은 건물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뛰어넘는다. 이 시에는 시적 화자 ‘나’를 포함한 사람들의 ‘집’에 관한 복합적인 정서가 담겨있다.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은 ‘집’을 ‘소유’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집 있는 그들”은 ‘유주택자(有住宅者)’가 되고, “아직 집이 없”는 이들은 “무주택자”가 된다. 이 시의 화자 ‘나’는 ‘무주택자’로서 ‘유주택자’들을 “부러”워한다. ‘나’는 ‘무주택자’라는 현실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거나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또는 “허세를 떨고 다녔지”만, “기나긴 엇박자 삶을” 부정할 수가 없다. ‘나’의 손은 “놓치고 없는 것들을”, “꼭 쥐고 있”는, “빈손”이기 때문이다. 특히 “곧 큰돈이 들어올 거야”라는 ‘나’의 호언장담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밤”의 “적막”함과 어우러지며 무주택자의 서러움을 적화하게 포착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중략〉-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또 가고
올이 굵은 무명 치마저고리 입은
힘센 황소 같은 엄마
뵐 수 없는 엄마가 마음속에 있고
엄마를 향한 수많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엄마의 궤도를 따라가면
훅 끼쳐 오는 만장 바람이 인다
상석만 덩드러니 묘를 지킨다
울컥, 굵은 눈물이 쏟아진다
봄이 돼서야 야생화 겹겹이 둘러싸여 빙긋이 웃는
그때 내가 왜 속을 썩였을까
뒤늦게 후회 남발하는 바보천치다
응급실에서 느닷없이 떠나지 않으셨다면
엄마 손 꼭 잡고
발바닥에 통증 올 때까지 여행 다닐 텐데
늘 부족한 나를
한 집안을 일으키는 재목감으로
손색이 없다는 엄마
눈 감으면
도리에 어긋난 행동에 익숙했다는 것에
눈 뜨면
한 걸음쯤 물러나 생각했으면 하는 것에
누런 옛 사진을 보면
산 너머 어디쯤에 엄마가 오고 있을 것만 같다
-「도리를 몰랐던 것에 대하여」 전문
홍경흠은 이 시에서 시적 화자 ‘나’의 “엄마”를 향한 “도리”를 이야기한다. ‘나’는 ‘엄마’에 대한 “도리를 몰랐던 것에 대하여”, “도리에 어긋난 행동에 익숙했다는 것에” 사과하고 싶다. 시인은 ‘엄마’에게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길에 충실하지 못했던, 이 세상 모든 자식들의 입장을 시적 언어로서 형상화한다.
엄마는 “늘 부족한 나”를 “한 집안을 일으키는 재목감으로”서 추켜올렸지만, ‘나’는 “그때”, 엄마의 “속을 썩였”다. ‘나’는 “뒤늦게 후회 남발하는 바보천치”인 셈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또 가고”라는 이 시의 1연은 계절, 시간, 세월, 인생의 속절없는 흐름을 제시한다. 엄마는 이제 “뵐 수 없는 엄마”가 되었다. “응급실” “만장” “상석” “묘” “누런 옛 사진” 등의 어휘는 ‘엄마’가 ‘나’와는 다른 세계로 떠나버렸음을 암시한다. “엄마 손 꼭 잡고/ 발바닥에 통증 올 때까지 여행 다닐 텐데”라는 ‘나’의 심경은, 부모와 이별한 이 세상 모든 자식의 마음을 대변한다. 홍경흠의 이 시를 21세기의 사모곡(思母曲)으로 규정해도 좋을 것이다.
노인이 노인에게 말을 걸면
아픈 말을 뱉어낸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매한가지여
현실적인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시간만 죽이고 있잖아
독보적인 아이디어가 반짝거려도
줄줄이 달려 나오기는커녕 멈춰 설 수밖에 없잖아
죽을 일만 남았다는 거지
공원에라도 있다 보면 죽음을 잊거나
죽음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어서 좋다
어쩌다가 울리는 휴대폰에서는 부고장뿐이다
저장된 사진들은 모두 영정 사진 같다
몸이 찌뿌둥해도
출근도장 찍듯 공원에 간다
날 궂어도 쓸쓸해도 간다
내게는 공원이 사랑이다
그곳엔 털털한 사람냄새가 난다
-「노인과 공원5」 전문
70대 중반에서 후반을 넘나드는 나이를 고려할 때, 홍경흠은 “노인”에 해당할 수 있다. 그는 이번 시집에서 “노인과 공원”이라는 제목의 연작시(連作詩)를 제공한다. 이번 시는 ‘노인과 공원’ 연작의 다섯 번째 작품으로서 독자들에게 생생한 현장감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시적 화자 ‘나’는 친구나 지인으로서의 노인에게서 “아픈 말”을 듣게 된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나 매한가지여”, “시간만 죽이고 있잖아”, “멈춰 설 수밖에 없잖아”, “죽을 일만 남았다는 거지” 등 날카롭고 매서운 말의 폭력 앞에서 ‘나’는 해결책을 찾아본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들은 모두 영정 사진 같”고, 수신되는 메시지에는 “부고장”이 쌓이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 ‘나’는 “공원”을 발견한다.
‘공원’은 ‘나’에게 “죽음을 잊거나/ 죽음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나’가 “날 궂어도 쓸쓸해도”, “출근도장 찍듯 공원에” 가는 이유는, 그곳에 가면 “털털한 사람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내게는 공원이 사랑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의 노인들을 포함한 이 시를 읽는 모든 독자들은 시인의 제안을 수용하여 공원에 나가볼 일이다. 사람들에게 밝고 긍정적인 기운을 공급하는 소중한 공간으로서의 공원은 이렇게 사랑과 동의어가 된다.
3.
홍경흠의 새 시집을 독자들과 함께 읽어 보았다. 이번 시집에서 그가 집중하는 주제는 노화, 죽음, 집, 사랑 등의 어휘와 긴밀하게 관련되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의 시인에게 안개처럼 다가오는 노화의 그림자는 두려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노인이라는 불가피한 현실 속에서 홍경흠은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기도」 「묏자리」 「고물상」 「노인과 공원5」 등의 시들은 노화와 죽음을 향한 시인의 반응과 대응을 진솔하게 제시한다.
홍경흠의 이번 시집에서 독자들의 호기심을 이끄는 시적 주제 중 하나는 집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집이라는 말에」, 「덜컥 적시며 날아오르려는데」 등의 시들에서 언급한 “무주택자” “큰돈” “허세” “빈손” “창문 없는 방 한 칸” “통장잔고” “마이너스” “몇 억” “십 수 억원” “내 집 마련” 등의 단어나 어구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욕망을 가감 없이 전달한다.
시인은 진실한 사람이고 솔직한 사람이다. 노화, 죽음, 집 등의 대상은 그에게 때로는 아픔으로서 다가왔을 테고, 때로는 슬픔의 정서를 불어넣었을 테다. 그러나 홍경흠은 이대로 무너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랑이라는 특별한 정서가 있기 때문이다. 「별스런 방정식」, 「연둣빛」, 「노인과 공원5」 등 시인이 준비한 시들 속에는 사랑이 위치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사랑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 바 있다. “사랑은 불꽃만큼이나 빛이어야 한다.(Love must be as much a light as it is a flame.)” 사랑에 관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언급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홍경흠의 시에 내재하는 사랑의 힘과 가치에 공감하게 된다. 불꽃처럼 빛나는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있을 때, 우리는 아픔과 슬픔의 장애물들이 숨겨진 인생이라는 이름의 행로를 거뜬히 걸어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의 시 세계는 앞으로도 더욱 크고 힘찬 불꽃의 형태로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