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을 둘러싼 편견을 벗어라
노인을 둘러싼 편견과 선입견에 분노했던 작가의 메시지는 언제나 유효할 것이다. 우리는 연배에 집착하는 문화에 익숙한 탓인지 생애 주기별 목표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따르려 한다. 다섯 살 전까지는 한글을 배우려 하고, 스무 살에는 대학을 가고, 서른이 되기 전에 직장을 구하고, 늦어도 30대 중반에는 결혼해야 한다는 관습과 규율에 자신의 인생을 몸소 묶는다. 삶을 숫자에 헌납하는 것이다. 마치 짐승이 가축이 되듯이 인생이 삶에 길들게 되는 것이다.
작가 김욱은 이런 호적상의 나이보다 자신만의 경험과 생애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저자 본인이 그렇듯이 누구나 70세에, 80세에, 하다못해 90세에도 미처 깨닫지 못한 재능을 발견하고, 이를 직업으로 삼아 얼마든지 제2의 전성기를 살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후’를 치열하게 살았던 인생의 전반전에 대한 보상 내지는 휴식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세상사에 달관한 척, 인생에 초연해진 척을 해서도 안 된다. 삶의 후반부를 제대로, 확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노인도 엄연한 주체이자 주인공임을 자각해야 한다.
노화는 단순히 늙어가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니다. 노화는 세상을 알아가는 재밌는 과정이다. 늙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기력이 떨어져 힘들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몸은 정말로 늙게 된다. 매사 활발하게 움직이고, 분노해야 할 부조리에 분노해야 하며, 할 수 있는 찾아서 직접 처리하는 삶이야말로 세상이 규정하는 노인이란 프레임을 깨부수는 길이다. 몸이 예전만 못할 수 있다. 정신이 이전처럼 총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노인이라고 주저앉히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자신만의 패도(覇道)를 당당하게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죽는 날까지 주체로 살다 떠나는 유일한 방법이다.
■ 마지막까지 삶을 이야기하라
흔히 사람과 짐승의 차이 중 하나로 과거를 반추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짐승은 자신의 사후를 염려하지 않으나 인간은 죽음을 고민하고 죽음 이후를 상상한다. 자신이 어떤 평가를 받을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지 염려할수록 행동이 소심해지고 걸음이 조심스러워진다. 본인의 죽음이 본인의 것이라도 되듯이 죽은 후의 가족을, 세상을 어떻게 하겠다는 미천한 발상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일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삶이 불행한 이유, 불행하게 보이는 이유도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참으로 철학적인 질문이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자신만의 인생을 개척한 작가는 이 질문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았다. 살려고 태어난 존재가 죽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죽고 난 뒤에는 누가 무어라 떠들든 들리지 않는다. 겪을 수도 없을 일을 걱정하며 살아 있는 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얼마나 교만하고 어리석은 행동인가? 작가가 보기에 노인네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할 노망이란 죽은 후를 두려워하는 꼴같잖은 교만이다.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세상사다. 인생의 후반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마지막까지 삶을 이야기해야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행동으로 움직일 때, 비로소 노인은 노인이란 굴레를 부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