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이 될 겁니다.”
차갑고 냉정한 법의 논리보다 사람을 먼저 보며
법을 통해 두 번째 기회와 희망을 선물한 변호사
『두 번째 기회를 위한 변론』의 저자 왕미양 변호사가 법조인으로 활동을 시작한 2000년은 전국에서 활동하는 여성 변호사를 모두 모아도 100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로 법조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남성 중심의 영역이었다. 게다가 지방인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데다 지방대를 졸업해 비주류 조건을 겹겹이 두른, 이른바 ‘3중 비주류’였다. 그렇지만 “항상 행복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말을 삶의 신념으로 생각하는 저자는 이렇게 불리한 조건조차 기회로 삼았다.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비주류가 되는 법조계에서 또 다른 비주류 조건을 겹겹이 두르고 있는 나야말로 가려져 있는 사회적 약자를 먼저 볼 수 있고, 누구보다 그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25쪽)
저자는 이 생각을 실천하듯 변호사 활동 초기부터 성남여성의전화에 제 발로 찾아가 전문위원으로 무료 상담을 자원했다. 이후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전문상담위원, 법무부 인권옹호자문단 자문위원, 대한변호사협회와 서울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회 위원, 한국가정법률상담소 100인 변호사단 등 아동과 여성을 비롯해 사회적 약자의 인권 보호를 위한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2010년부터 13년 동안 개인파산관재인으로서 2,400여 명의 사람들이 사회의 일원으로 다시 시작할 두 번째 기회를 열어주었다. 공정성과 투명성 준수를 위해 엄격한 평가를 받는 파산관재인으로 13년간 선임되며 성실함과 역량을 검증받았다.
이 책은 25년 동안 한결같이 무너지고 쓰러진 사람들의 곁을 지키며 법을 통해 다시 일어서도록 도왔던 시간의 기록이다. 그것이야말로 법이 존재하는 이유이고, 자신이 변호사가 된 이유라고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차가운 법의 논리보다 사람을 먼저 볼 줄 알았던 그였기에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낀 것을 오롯이 담을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이 변호사가 되었던 계기와 법이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된 과정에 대해서도 담담한 언어로 풀어낸다.
오징어 게임 초대장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의 이웃이자 친구, 가족이었다
왕미양 변호사의 법조 경력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 중 하나는 전국 법원에 파산관재인 제도가 도입된 2010년부터 13년 동안 활동했던 ‘개인파산관재인’이다. 법원이 선임하는 파산관재인은 파산과 면책 절차의 공정한 진행을 돕고 파산자의 재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빌린 돈은 당연히 갚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질문은 저자가 파산관재인으로 일한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 자주 들었던 말이다. 우리는 흔히 ‘파산한 사람은 게으르거나 무책임할 것’이라 단정하면서 ‘자초한 일이기에 사회적 비난을 감수하고 대가를 치르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생각한다. 저자도 파산관재인 활동 초기에는 막연한 선입견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마주한 이들은 절망 속에서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도리를 다하려 노력했고, 마지막 희망의 끈을 잡고자 발버둥을 쳤다. 2,400명이 넘는 채무자들로부터 수도 없이 들었던 첫마디는 하나같이 “죄송합니다.”였다. 그렇게 그들은 빚으로 인해 죄인이 되어 있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을 보면 많은 경우 빚의 무게에 허덕이다 위기를 반전시킬 마지막 기회로 생사를 건 게임에 참여한다. 저자는 이 드라마 속 참가자들과 너무도 닮은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평생 성실하게 일해온 노동자, 가족을 위해 자신을 아끼지 않았던 가장부터 한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했던 연예인,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고위 공무원, 고소득 전문직의 대표 직군인 의사까지. 이들은 허구 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실재하는 이웃이자 친구, 가족이었다.
이 책의 1장과 2장에는 간절히 두 번째 기회의 끈을 잡고자 했던 이들의 사연이 담겼다.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섰던 그들은 엄격한 법적 절차와 상응하는 책임을 성실히 수행한 끝에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고 간절히 바라던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법과 숫자에 가려진 가지각색의 사연을 따라가다 보면 “단순한 ‘실패자’가 아니라 다시 일어서려는 ‘도전자’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89쪽)이라는 저자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을 향해 저자가 남기는 간곡한 당부는 우리 모두 한번쯤 되새겨볼 만하다.
이 글을 읽게 될 이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파산 제도는 단순히 빚을 탕감해주는 제도가 아니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책임감을 갖고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제도다. (중략) 파산 제도는 바로 그런 사회적 안전망의 역할을 한다. 우리는 홀로 살아갈 수 없다. 공동체로 살아간다. 차가운 시선을 조금만 거두고 일어서는 이들의 노력을 지켜봐주는 것은 어떨까. (20~21쪽, ‘이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중에서)
법은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진실을
꿋꿋하게 증명해온 한 변호사의 발걸음
왕미양 변호사가 법조인이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한 집 건너 한 집이 왕씨인, 개성 왕씨 집성촌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던 해. 커서 무얼 하면 좋겠냐는 질문에 “나쁜 짓을 한 사람은 혼 좀 내주고 벌도 받게 하고,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은 도와주고 하는”(209쪽) ‘법 만지는 사람’이 되라는 어머니의 당부가 그 시작이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꿈은 그의 꿈이 되었고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일을 해내겠다는 다짐에서 삶의 방향이 결정되었다. 그 후로 처음 다짐을 실천하며 한 걸음씩 발걸음을 옮겼다.
변호사 활동 초기부터 자원했던 성남여성의전화 전문위원 활동을 계기로 참여하게 된 성매매 여성들의 법률 구조와 상담 사례를 담은 글을 통해서는 때로 차갑고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변호사라는 직업이 오히려 사람의 온기가 가장 필요하다는 그만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살인미수 피고인의 변호인이었던 첫 번째 국선 변호 사례에서는 변호 대상의 법적 권리와 인권 보호라는 측면과 공정하고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변호 사이에서 고뇌하고 올바른 방향을 찾아갔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외에 국내 첫 번째 남편 강간 기소 사건, 유책 배우자인 남편의 변화 가능성을 발견하고 부부를 설득해 재결합을 도운 이혼 사건 등의 사례를 읽다 보면 이 책을 추천한 양소영 변호사가 왜 저자를 “사람을 잃지 않는 법조인”이라고 표현했는지 공감할 수 있다.
법조인이 되기까지 자신을 믿고 손길을 내밀어준 사람들을 떠올리며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기로 결심하고,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아직 너무도 많이 남아 있다는 저자가 앞으로 어떤 활동을 이어갈지 기대하게 될 것이다. 차가운 법의 논리보다 사람을 먼저 볼 줄 알았던 저자의 글로 채워진 『두 번째 기회를 위한 변론』은 독자들에게 법의 진정한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과 함께 깊은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