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문장 속에 살아 있는 여름
여름이라는 계절이 건네는 열정, 변화, 그리고 기억의 이야기들
《여름 언덕에서》는 헤르만 헤세, 안톤 체호프, 제임스 조이스, F. 스콧 피츠제럴드, 버지니아 울프 등 세계 문학사의 거장들이 남긴 아홉 편의 단편을 엮은 세계 문학 단편선이다.
이 책에는 모두 ‘여름’을 배경으로 하거나 ‘여름’의 정서를 바탕에 둔 작품들이 실려 있다. 뜨거운 갈망과 위태로운 충동, 흔들리는 감정과 예기치 않은 깨달음, 그리고 무르익은 관계의 전환점처럼, 여름이라는 계절이 품은 진폭 큰 감정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청춘의 감정을 여름날 폭풍에 빗대어 풀어낸 헤르만 헤세의 〈폭풍〉부터, 익명의 연애편지를 받은 남자의 한바탕 소동기를 그린 안톤 체호프의 〈여름 별장에서〉, 식물원 풍경과 그곳을 찾은 사람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포착한 버지니아 울프의 〈큐 가든〉, 도회적 분위기에 물든 남자가 고향의 자연 앞에서 진짜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를 담은 오 헨리의 〈도시의 패배〉, 광활한 숲을 그린 그림을 보며 위로받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다룬 수잔 글래스펠의 국내 첫 번역작 〈저 너머 어딘가〉, 딸과 하숙생의 결혼을 꾀하는 여주인을 통해 아일랜드 사회의 위선을 비춘 제임스 조이스의 〈하숙집〉, 시골에서 여름을 보내는 사춘기 소년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 호리 다쓰오의 〈밀짚모자〉, 사랑과 삶의 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성의 선택을 그린 샬럿 퍼킨스 길먼의 국내 첫 번역작 〈작은 집〉, 사교계의 스타가 되고 싶었던 소녀는 왜 단발머리가 되었을까? 욕망과 질투의 반전 드라마인 스콧 피츠제럴드의 〈버니스, 단발머리가 되다〉까지, 작품들은 저마다의 개성과 결을 지닌 채 ‘여름’이라는 하나의 계절을 다양한 정서와 서사로 그려낸다.
이 책을 펼치는 순간, 여름 언덕에 부는 바람처럼 찬란하고 짙은 여름이 눈앞에 펼쳐진다. 짧지만 밀도 높은 서사 속에 담긴 감정의 울림이 독자의 마음을 조용히 흔든다.
숨은 고전을 발견하는 여름
국내 첫 번역으로 만나는 세계 문학의 새로운 얼굴들
《여름 언덕에서》의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널리 알려진 작가들의 덜 알려진 단편을 새롭게 조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세계 문학사의 주요 작가들의 작품을 처음으로 소개한다는 데 있다.
《봄볕 아래에서》의 〈빛이 머무는 곳에서〉로 깊은 인상을 남긴 퓰리처상 수상 작가 수잔 글래스펠의 〈저 너머 어딘가〉와 미국 페미니즘 문학의 선구자 샬럿 퍼킨스 길먼의 〈작은 집〉이 이번에도 국내 첫 번역으로 수록되었다. 두 여성 작가의 숨은 걸작은 여름날의 선물처럼 다가와, 시대를 초월한 통찰과 감정을 또렷이 전한다.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고도 날카로운 시선, 현실을 비추는 섬세한 문장이 계절의 감각 속에서 더욱 깊이 스며든다.
수잔 글래스펠은 미국 문학사에서 결코 낯선 이름은 아니지만, 그 위상에 비해 국내에 본격적으로 소개된 적은 드물다. 이번에 처음 번역·수록된 〈저 너머 어딘가〉는 광활한 숲을 그린 그림 앞에 선 한 여성이 그 풍경 속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위로를 조용히 찾아가는 이야기다. 아무 말 없이 건네는 친절, 곁에 있던 존재의 흔적들이 삶의 공백을 천천히 메워가는 이 작품은, 예술이 우리에게 건네는 치유의 힘과 타인과의 연대가 지닌 깊이를 섬세하게 포착한다. 글래스펠 특유의 절제된 문장과 따뜻한 시선은, 모든 것이 분주하게 돌아가는 여름날 속에서 멈춰 선 시간처럼 고요하고 단단한 울림을 전한다.
샬럿 퍼킨스 길먼의 〈작은 집〉은 사랑과 독립, 삶의 방식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여성의 선택을 통해, 당대 여성들이 마주한 사회적 조건과 내면의 균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한편으로는 따뜻한 연애소설처럼 가볍게 펼쳐지지만, 그 안에는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구조적 문제에 대한 깊은 질문이 세련되게 녹아 있다. 사랑을 택할 것인가, 스스로의 길을 선택할 것인가. 작은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에 다다르게 된다.
《여름 언덕에서》는 이처럼 익숙한 작가들의 낯선 작품은 물론, 처음 만나는 세계 문학의 목소리까지 함께 담아 고전 문학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그 수용의 지평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품고 있다. 여름의 빛과 그림자처럼, 이 책 속 이야기들은 찬란함과 불안을 함께 머금으며, 오래된 문장 속에 살아 있는 감정의 온도를 오늘의 감각으로 되살려 낸다.
계절의 언어로 고전을 읽는다는 것
봄부터 겨울까지, 감각으로 엮어낸 세계 문학 단편 선집
고전은 시대를 넘어 인간의 감정과 사유를 품고 있다. 그러나 그 문장이 오늘의 언어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는, 독자의 삶에 닿는 감각의 통로가 필요하다. 《봄볕 아래에서》에 이어 출간된 《여름 언덕에서》 역시 그 접점을 ‘계절’이라는 감각의 층위에서 찾는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기억과 감정으로 스며드는 ‘여름’이라는 시간, 그 안에 깃든 무르익은 열정과 불안, 위태로운 충동과 찬란한 순간을 따라가다 보면, 고전의 문장은 결코 낯설지도 멀지도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 실린 아홉 편의 작품은 단편이라는 형식이 지닌 응축의 미학과 서사의 밀도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길지 않은 분량 안에 한 인물의 내면, 한 시대의 정서, 하나의 계절이 정제된 문장으로 담겨 있으며, 그 안에서 독자는 더 밀착된 감정의 순간을 만난다. 때로는 끝내 말해지지 않은 문장들 사이에서 더 깊은 사유가 피어나고, 그 여백 속에서 고전은 오늘의 언어로 다시 태어난다.
《여름 언덕에서》는 《봄볕 아래에서》에 이어, 계절을 따라 이어지는 세계 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여름’이라는 감각을 실마리 삼아 고전을 다시 꺼내 읽도록 기획되었으며, 가을과 겨울의 이야기들 또한 이어질 예정이다. 독자는 한 해의 사계를 문학의 감각으로 천천히 건너며, 고전이라는 거대한 숲에서 지금 나에게 가장 가까운 한 편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계절이 우리 곁을 다시 찾듯, 고전도 언제나 다시 돌아온다. 지금 이 여름, 지금의 독자에게 가장 가까이 닿는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