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오기 전, 감정은 이미 거기 있었다
- 최해돈 시집 『여름을 생각할 때 겨울은 시작되었다』
최해돈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여름을 생각할 때 겨울은 시작되었다』(달아실 刊)가 달아실기획시집으로 출간됐다.
이 시집은 눈썹 위에 맺히는 이슬처럼 조용한 언어로, 독자의 내면에 천천히 감정을 싹틔운다. 언뜻 무심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 시들 속에는 오래 축적된 시간과 기억, 결핍과 응시의 태도가 깃들어 있다.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한 포기의 풀/ 한 그루의 은행나무/ 한 개의 돌/ 한 개의 모래알/ 한 개의 먼지/ 한 묶음의 생각”(「리듬」 부분)
이 시구처럼, 감정은 세계의 가장 작은 단위와 만나면서 발아한다. 시인은 익숙한 풍경 속에서 아주 느린 속도로 시선을 움직이며, 감정이 생성되는 풍경의 밀도를 담아낸다. 이때의 감정은 과장된 감정이 아니라, 서서히 깊어지는 사유와도 같은 것이다.
“언덕이 미치도록 떠오를 때가 있었다. 언덕이 너무 그리워, 언덕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서, 언덕이 되고자 하였다/ 언덕을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 언덕이 되어 흘러가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언덕은 풍경을 먹으며 살이 찌기도 하였고, 나는 언덕 너머의 언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흔들리는 원근법」 부분)
그는 언덕을 조용히 응시하는 사람이자 그 응시로 인해 스스로 언덕이 되는 존재로, 사물과 제 경계를 지우며 감정의 물성을 탐색한다. 언덕은 단지 풍경이 아니라 그가 되고자 하는 상태이고, 그 속에서 시인의 감정은 더 뚜렷해진다.
박성현 평론가는 해설에서 “눈꺼풀 아래로 스며드는 시, 근육 속으로 파고드는 언어, 귓속을 울리는 애틋한 목소리, 그 속에서 아주 오랜 시간 고여 있던 정적이, 문장에 덧칠되었던 특유의 억양과 손에 잡힐 듯 뚜렷한 이미지가 우리의 마음에 뒤섞이면서 발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발아의 언어는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서서히 피어나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정서적 풍경으로 확장된다.
시 「스타카토」는 이 시집의 면면을 잘 보여주는 시 중 하나다.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는 문장이 열두 번 반복되는 동안, 주변의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변화한다. 그러나 그 반복은 단순한 되풀이가 아니다. 변화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자리 잡는지를 내밀하게 되짚는다.
다 다다다 후다닥 소나기가 지나간 후, 오후가 조금씩 접히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몸이 둥근 고요가, 여름의 문턱으로 타박타박 걸어가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밝음과 어두움이 평행선 위에서 스스로 교차하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있음과 없음의 간격이 점점 좁혀지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폭염으로 인해 학교 담벼락이 슬피 울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팽팽함과 느슨함이 들판으로 달리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믿음과 믿음 속에 새로운 믿음이 태어나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하루의 직선과 곡선이 학교 운동장에 사뿐사뿐 내려오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긴 하루를 건너는 동안 흩어졌던 마음이 충돌하며 쿵쾅거리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문득 일요일과 수요일 사이의 숲을 생각하며 물끄러미 걷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달력에 기록되어 있는 빼곡한 글자가 하루의 문장이라고 생각할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매미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여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콩새는 거기에 앉아 있었다
- 「스타카토」 전문
반복되는 문장은 감정의 퇴적층처럼 쌓이면서 각기 다른 온도와 리듬을 만들어낸다. 그 변화의 감각은 차곡차곡 쌓이는 장면과 함께 리듬을 타고 독자에게 전달된다. 반복은 멈춤이 아니라 감정의 천천한 생성 과정이다. 최해돈 시인은 그렇게 감정의 진동을 고스란히 포획한다.
그가 느끼는 감정의 진동은 복잡한 내면의 구조 속에서 비롯된다. 감정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라, 대상과 거리를 유지한 채 관찰하고 응시함으로써 발생하는 느린 떨림이다. 시 「너의 숙성」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를 생각해본다. 너의 행로를 따라가본다. 너의 어제를 살펴본다. 너의 과거를 기억해본다. 너를 관찰해본다. 너를 분석해본다. 너의 행적을 들여다본다.(…중략…)// 너에게서 너라는 사람이 자꾸만 출현한다”
감정은 이처럼 반복과 시간의 누적 속에서 점차 드러나는 것. 정서적 순간이 아니라 구조적 형성물에 가깝다. 사물이나 존재는 시인의 감정에 따라 달리 인식되며, 그 과정은 자주 느리고 반복적이며, 미세한 관찰로 구성된다.
“플라타너스는 잎마다/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플라타너스」 부분)라는 문장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물조차 내면에 진동하는 감정의 결정을 품고 있다. 이는 감정의 묘사가 아니라, 감정이 만들어지는 ‘형식’ 자체에 대한 탐구라고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시인 김연종은 이를 “최해돈 시인의 시는, 독백이자 함성이다. 가만가만 혼자 부르는 노래는, 어느새 거리에 울려 퍼지는 외침이 된다”고 표현했다.
시인 이종섶은 “최해돈의 시집은 대상과 현상을 ‘소유하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새로움이란 시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소유하는 힘’의 발화일 터, 대상은 대상대로 현상은 현상대로 소유해서 풀어내는 힘이 여기에 있다”고 썼다.
『여름을 생각할 때 겨울은 시작되었다』는 우리를 언어 이전의 감각으로 천천히 데려가며 감정의 진동과 근원을 생각하게 한다. 시의 고요함이 타인의 마음에 가닿는 방식이자, ‘감정의 발아’이기도 하다. 풍경의 한 잎 한 잎을 쌓아 올리며 기어코 감정을 포획한 성채, 그게 이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