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순정 시인의 시집 『엄마의 정원』을 처음 펼치는 순간, 한 여인이 세상의 이름으로 불리기 전, 오롯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냈던 시간을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 정원엔 무수한 꽃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피어 있었고, 바람결에는 사랑, 상실, 기다림 같은 오래된 감정의 향기가 섞여 있었다. 시인의 언어는 엄마이기 이전의 한 여인이 품었던 삶의 갈피이며, 그 안에는 꾹꾹 눌러 담아온 속마음과 끝내 말하지 못했던 고백이 조용히 피어나고 있었다. 그 시 한 편 한 편은 삶의 뒤란에서 건져 올린 고요한 진실이며, 우리가 잊고 지낸 마음의 조각들을 살그머니 꺼내 보여준다.
무엇보다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유난히 섬세하고 따뜻하다. 찻잔 속 김을 행복이라 말하고, 찬 바람 속의 수국에서 숨결을 발견하며, 콩국수 위에 얹힌 오이채 하나에 삶의 풍경을 담아내는 감각. 시인은 사물과 감정을 경계 없이 어루만지며, 일상 속에 스며든 기억과 감정을 자연스럽게 꺼내 보인다. 이 섬세함은 시인의 시선이 언제나 대상과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증거다. 그는 꽃을 보고, 별을 보고, 사람을 바라보되, 늘 그 안에서 자신의 기억과 사랑과 고백을 함께 꺼내어 놓는다. 그렇기에 독자는 시인의 시를 읽는 동시에 자신의 오래된 감정과 마주하게 된다.
시집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노을처럼 아름다운 그대에게〉에서는 첫사랑의 붉은 감정, 우정과 인연의 소중함, 그리고 함께 걸어온 시간에 대한 따뜻한 고백이 펼쳐진다. “행복은 찻잔 속에 피는 김이다 / 손에 잡히지 않지만 / 그 따스함은 오래 남는다”는 시구처럼, 시인의 사랑은 소리 없이 세상을 밝혀주는 별빛 같고, 조건 없이 등을 비비는 고양이 같고, 마음에 싹 틔우는 씨앗과도 같다.
제2부 〈꽃으로 살고 싶다〉는 제목 그대로, 꽃처럼 피어나고 싶었던 시인의 바람이 담긴 장이다. 통도사 매화, 순천만 국가정원, 유채꽃, 동백꽃… 계절마다 피어난 꽃들을 통해, 시인은 기다림과 인내, 그리고 조용한 환희를 노래한다. 특히 ‘꽃으로 살고 싶다’에서는 “꽃이 피면 나비로 / 꽃이 지면 봄비로 / 꽃밭에서 꽃처럼 살고 싶다”고 읊조린다. 그 마음은 결국, 사람으로 살되 꽃처럼 아름답게, 그리고 조용히 이웃을 살피며 살고 싶은 시인의 염원이 담겨있다.
제3부 〈세월은 단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는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무게는 회고이자 성찰이다. ‘지우개’에서 시인은 “사랑은 시간 속에 피는 꽃 / 마음에 짙게 새긴 글자 / 아무리 지우려 해도 / 달빛 속 그림자처럼”이라 했고, ‘부부’에서 “우리 사랑 /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 서로에게 가장 큰 기적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리움, 슬픔, 상실 속에서도 삶을 버텨낸 힘은 결국 ‘사랑’이었음을, 시인은 거듭 확인한다.
그리고 마지막 제4부 〈희망이 꽃처럼 피어나길〉은 이 시집의 가장 빛나는 종착지다. ‘희망’에서는 “희망이란 / 이름 없는 작은 빛 / 손에 쥐어지지 않는 따뜻함”이라 말하며, 고통 속에서도 다시 피어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준다. “바람 불고 비가 내려도 / 우리 삶 속에 피어나는 / 아름다운 꽃처럼”이라는 마지막 시구는, 바로 이 시집이 독자에게 건네는 진심 어린 인사와도 같다. 무수한 고통과 흔들림 속에서도 살아가야 한다면, 그 삶은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야 한다는 고요한 외침.
이 시집을 추천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엄마’라는 존재의 무게를 알고 살아온 이들이라면, 그 정원이 얼마나 따뜻하고 눈물겨운 곳인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자리한 엄마를 다시 불러내고, 그 품에서 피어난 수많은 감정들을 정성껏 되살려낸다. 그 시들은 우리의 잊힌 기억을 불러오고, 때로는 마음 한구석을 찡하게 흔들기도 한다. 시인이 씨앗처럼 흩뿌린 언어는 독자 안에서 조용히 발아하며, 어느 봄날 꽃처럼 피어날 것이다.
지금 이 시집을 펼치는 당신, 어쩌면 당신의 마음에도 조용히 바람이 불고 있는지 모른다. 그 바람 따라 피어나는 시 한 편이 당신의 위로가 되기를. 그리고 『엄마의 정원』처럼, 누군가에게 당신도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