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과 몸에 관한 새롭고 특별한 아포리즘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한 여성 패션디자이너의 파란만장한 삶에 바치는 헌사다. 옷과 몸에 관한 빛나는 아포리즘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특정한 장르에 갇히는 걸 거부한다. 기존의 예술 장르를 구분하는 원칙에서 벗어나 새롭고 자유로운 글쓰기 방식을 시도한다. 시 같기도 하고, 소설 같기도 하고, 동화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한, 이전에는 없었던 형식을 창출하기 위해 안도현은 장르의 경계와 구속을 뛰어넘으면서 끊임없이 노력했다. 이처럼 특별한 방식의 글쓰기를 거쳐서 탄생한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를 독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작가 스스로도 궁금해서 장르를 특정하지 않은 채 내놓게 되었다.
‘시소설’이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발표된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을 읽고 그 난해한 형식과 내용을 접해본 독자라면, 막상스 페르민이 쓴 『눈』의 고혹적인 흰색 이미지에 강렬하게 사로잡혀본 독자라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작품 『흰』의 강렬하고 시적인 문장에 빠져본 독자라면,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를 읽고 아하, 하면서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패션 디자이너,/ 한 폭의 옷감을 자르고 붙여서/ 옷감이라는 납작한 평면을/ 입체로 만드는 사람.// 그 속에 몸뚱이와 팔과 다리를 넣고// 누워 있던 옷감을 일으켜 세워// 앞으로 걸어가게 하는 사람
-6쪽
옷감,/ 얇아질 대로 얇아진 물결 같은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숨기고 싶은 것을 드러나게 할 수도 있는 천
-33~34쪽
옷은 그러니까/ 몸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다./ 입이 없는 몸이/ 노래를 하는 그 찰나가/ 바로 옷이다.
-125쪽
옷,/ 형상이 없는 마음에/ 가시적인 모양을 부여하는 예술
-131쪽
철학적 서사와 서정적 문장의 아름다운 결합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국내에서 150만 부가 팔리고 전 세계 15개국 언어로 번역된 『연어』 이후 안도현이 가장 공들여 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IMF로 힘들었던 시절에 『연어』로 많은 독자에게 따듯한 위안을 선사했던 안도현은, 곁에 없는 자유를 찾던 사람들과 지금도 불확실한 미래의 주인이 되고 싶어 애쓰는 청춘들을 위해서 이 책을 내놓았다.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고 고뇌하는 청춘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안도현의 선물과도 같은 책인 것이다.
서사와 서정의 아름다운 결합을 통해 인간과 사물의 생에 대한 격조 있는 사유를 그려낸 『판탈롱 나팔바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오래된 것,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 저 낯설고 푸릇푸릇한 세상을 향해 나아가자고 말하고 있다.
이 이야기를 읽고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옷은 그저 자르고 기워서 만드는 공산품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 속에 발가벗은 역사가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씩의 만장이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생(生)’이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대한의 ‘격(格)’이라는 점에서 사물로 쓴 역사서인 것이다.
-신용목(시인ㆍ계명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