無의 그림자, 자비의 윤곽
불교는 본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길입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의 가르침은 눈앞의 형상이 곧 허공이라는 선언이며, 이는 곧 형상 너머의 실재를 향한 통찰입니다. 동인스님의 그림은 바로 그 형상의 이면, ‘비가시적 진리’의 형상화를 향한 묵언의 여정입니다.
이 책에 담긴 부처와 보살의 도상들은 전통적인 불화의 형식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정답을 말하지 않고, 질문을 환기시키는 그림입니다. 어떤 도상은 윤곽조차 흐릿하고, 어떤 채색은 찬란함보다 침묵을 머금습니다. 이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이 그림은 부처를 그린 것이 아니라, ‘부처를 그리려는 마음’을 그리고 있음을.
동인스님의 화업은 수행 그 자체입니다. 붓을 드는 순간, 그는 화가이기보다 마음의 결을 따라가는 순례자입니다. 그러하기에 이 그림들은 ‘예술’의 언어로 말하지만, 그 울림은 ‘종교’의 지평에 이릅니다. 정밀한 묘사보다 더 깊은 울림이 있는 이유는, 그 모든 형상이 결국 자성(自性)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무념(無念)의 마음으로 그려진 형상에는 계산된 아름다움보다 깊은 침묵의 리듬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상을 조형한 것이 아니라, 형상 이전의 침묵, 색채 이전의 고요, 선 이전의 자비를 표현하려는 수행자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보다’라는 행위의 본질에 묻게 됩니다. 보는 것이 곧 깨어나는 것이라면, 이 책은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깨달음의 입구’로 인도하는 조용한 길잡이입니다.
동인스님의 그림은 말하자면 **침묵으로 염송되는 선시(禪詩)**요, 빛으로 드러나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에는 사상의 선명함이 아니라 존재의 가벼움, 그리고 무(無)로 환원되는 존재의 투명함이 있습니다.
이 화보집은 형상 속에 진리를 숨기려는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상이 무너진 자리에야 비로소 진리가 깃든다는, 불교 미학의 오래된 원리를 정성껏 실천한 결과물입니다. 색은 물들되 마음을 흐리지 않고, 선은 흐르되 자비의 경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 책은 결국 하나의 말 없는 공양(供養)입니다.
부디 이 책이, 누군가에게는 고요한 깨달음의 첫 순간이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