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만든 몰입과 치유의 시화(詩畫)
80편의 시와 79편의 그림에 담긴
생활의 지혜와 예술가 정신
시인은 외부를 향해 발언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더 열정적인 예술가로 살라고 타이르고 보듬는다. 그의 시편들과 형태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인이자 화가인 본인에게 거듭 ‘오늘의 결단’을 주문하고,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늘 배우면서 정진할 것을 권하는 평생학습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시화집 『소중한 오늘』(2023), 『글과 그림 사이』(2024)로 화제를 모았던 김연수 시인·화가가 이번에는 시와 형태화를 통해 인생의 의미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한 『삶의 향기 - 김연수 시와 형태화』(작품미디어)를 출간했다.
첫 시집인 시화집 『소중한 오늘』(2023)이 가정주부에서 철학박사가 된 화가의 시적 화음(和音)과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바로 오늘, 평탄한 삶에 깃든 일상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절제된 언어와 이미지로 담아냈다면, 『글과 그림 사이』(2024)는 오늘이 있기까지 시인을 만든 고전 속 고사성어와 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 없는 시간의 지층에 담긴 추억들을 소환해 특별한 그림으로 대화를 시도한 작업이다.
생활세계에서 건져 올린 시화(詩畫)의 화음
새롭게 선보이는 『삶의 향기 - 김연수 시와 형태화』(이하 ‘삶의 향기’)는 「마음과 말」 등 21편의 투명한 시를 수록한 1부 ‘처음 사는 인생’, 「아름다운 인연」 등 22편의 담담한 시편을 소개한 2부 ‘순간에 대한 애착’, 「쑥개떡」 등 21편의 따뜻한 시들을 모은 3부 ‘사랑의 미래’, 「폭우」 등 16편의 그리움 가득한 시들을 담은 4부 ‘시 쓰는 오후’, 그리고 ‘존중하는 삶이란 단순한 삶이 아니라 올바른 삶이다’ 등 79편의 형태화를 담은 ‘삶의 향기’로 구성함으로써, 우리 시단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시화(詩畫)의 화음을 들려주는 독특한 시집의 모양새를 취했다.
‘가정주부에서 철학박사가 된’ 시인의 지적 이력 때문에 그의 시적 작업이 혹시 난해하지는 않을까 우려할 수도 있지만, 그의 시는 관념적이거나 난해하지 않다. 김연수 시인의 강점은, 현학적인 관념의 우물에서 언어를 길어 올리는 게 아니라 생활세계의 지평에서 언어의 옷을 다림질한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장마가 지거나 눈이 내릴 때, 마니산이나 북한산 계곡을 찾았을 때, 가을빛이 은은하게 내리는 날이거나 소나무숲을 거닐 때, 버스를 타거나 가을날 코스모스를 만났을 때…. 그의 시어들은 그렇게 획득되고 풍경을 그려낸다.
독일의 현대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1929.6.18~)가 제시한 철학적 개념 가운데 ‘생활세계’라는 게 있다. 하버마스의 생활세계는 목적 합리성(체계)과 대립하는 개념으로, 개인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삶의 공간이자 문화, 사회, 인성이 형성되는 토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단순한 문화적 총체성을 넘어, 사회적 행위와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김연수의 시적 발화가 탄생하는 곳이 바로 이곳, 생활세계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가정주부라는 생활인의 시선(視線)이 녹아 있는 한편, 동시에 이 생활세계를 구성하는 소소한 일상의 풍경들이 빚어내는 의미망이 겹쳐 있다.
생활인의 시선과 일상의 풍경이 빚어내는 의미망의 중첩은 시인이 드러내놓고 의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몰입의 과정이자 힐링의 순간들’이라는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 옷 속에 숨어 있는 살과 뼈와 정신은 그의 것이지만, 곧 독자들의 것으로 전환된다. 비록 시인이 『삶의 향기』 서문에 이렇게 썼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봅니다. 학창 시절 때 학원 수업을 받으며 미래의 꿈을 펼쳐 가던 친구들을 보며 내심 부러워했던 나의 사춘기 시절이 이제야 치유되는 기분입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는 그래서 나에게는 몰입의 과정이자 힐링의 순간들입니다.”
소중한 깨달음, 그 몰입과 힐링의 순간들
여기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몰입의 과정이자 힐링의 순간들’과 함께 ‘치유’라는 단어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시 쓰기와 그림 그리기가 몰입, 힐링 그리고 치유의 행위라는 고백은 중요하다.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삶의 향기』에 초대된 시들이 그의 방백과 같은 언어들로 구성돼 있음에도, 그 시어들이 활자화되어 독자들과 만나는 순간, 독자들에게도 어떤 몰입과 힐링, 치유를 안내하기 때문이다.
시인 예이츠는 말했지
육체는 노쇠해도
예지는 밝아오는 법이라고.
10대, 20대는 순리대로
순수하게 살았지만
30대부터
한 아이의 엄마가 되면서
배움의 길에
모험을 떠나는 아이처럼 나섰다네
지금도 그 길 위에서
예지를 찾고 있으니,
몸은 비록 세월에 닳아가도
마음만은 여전히
청춘이라네
- 「나의 철학」 전문
30대부터 엄마가 되어 모험을 떠나는 아이처럼 배움의 길을 걸어온 시인의 페르소나는 우리 시대의 많은 엄마의 모습이 분명하다. 시집 곳곳에서 공감의 정서를 만날 수 있다는 데 그의 시들이 지닌 미덕이 있다. 그런 공감의 정서는 우연히 획득된 게 아니라, “평생 배우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살갗을 뚫고 나오는 느낌들”(「배움에는 끝이 없다」)처럼 축적된 독서와 자기 성찰에서 비롯된다.
『삶의 향기』는 시인의 현재, 미래를 향한 아포리즘이 새겨져 있지만, 곳곳에 빼어난 서정성의 시편들도 선보이고 있다. 그가 언어의 보석을 캐내는 시인이자, 사물을 화선지 위로 재현해내는 화가임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소나무 숲길을 걸으면
그들이 내뿜는 향기에
온몸이 젖어 든다
자기들이 서 있는 자리에서
사철 푸른 몸으로 가득
빛을 받으려 어깨동무하는 그들
쭉 뻗은 몸보다
자유자재의 자세로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어루만진다
그들 사이로
더욱 청명한 하늘이 내려앉고
솔향기에 취한 나는
몸과 마음이
아득하게 맑아진다
- 「소나무 숲」 전문
바람 따라 자유로이
떠돌다 마음 닿는 곳에
홀씨 하나
돌담 모퉁이
따뜻한 봄볕 아래
노란 모자 쓰고
오고 가는 행인에게
보내는
하이얀 미소 한 점
고와라
- 「민들레」 전문
서정적 공감 위에 구축된 형태화의 아름다움
바로 이런 서정적 공감 위에 그의 형태화가 서 있다. ‘작은 습관이 큰 성과를 주게 된다’라는 글 아래 작은 오솔길을 그려 넣었고,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실천이 소중하다’라는 글에는 라벤더 꽃을 품은 아름드리나무를 그렸다. 하나하나가 시인의 현재를 만든 귀중한 성찰의 언어들이다.
형태화 83편은 수록된 시들과 함께 묘한 화음을 만들어낸다. 눈길 가는 대로 시 한 편을 골라 읽다가 마음에 드는 ‘경구’로 눈을 돌려 그림을 만나면, 독자들은 더 깊은 힐링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김연수는 외부를 향해 발언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어제보다 오늘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더 열정적인 예술가로 살라고 타이르고 보듬는다. 형태화들을 따라가다 보면, 시인이자 화가인 본인에게 거듭 ‘오늘의 결단’을 주문하고, 고마운 이들에게 감사하면서, 늘 배우면서 정진할 것을 권하는 평생학습인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김연수의 세 번째 시화집 『삶의 향기』가 서 있는 자리다.
김연수 시인·화가는 20대에 출판사에서 일하며 방송대를 다니며 공부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며 서예와 그림을 익혔다. 아들이 군대에 갈 무렵 십여 년 익힌 서예 덕으로 미술대학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좀 더 체계적으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이후 철학 공부에도 도전해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어제와 오늘에 감사하면서 더 나은 내일의 삶을 위해 정진하는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