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ㆍ『종용록』 등에 등장하는 화두공안 101칙을
석우 스님의 체험과 안목으로 노래한 간화선 지침서
화두공안은 선사들이 내방자가 들은 즉시 깨닫기를 희망하면서 던진 말이나 사건이다. 깨달음은 수행의 이력을 묻지 않는다. 중생은 본래 누구나 선사의 말을 즉시 알아들을 수 있는 역량을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다. 이것에 준해서 선사는 ‘말 떨어지자마자 즉시 알 수 있는 것’을 말했다. 그래서 운문 스님은 “말해줘도 보지 못하면 곧 잘못되어버린다. 머뭇거리며 생각하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말했던 것이다.
실제 방거사처럼 첫 내방 순간에 말 한 마디나 주장자를 맞고 깨달았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첫 대면에서 즉시 알아채고 깨닫는 것, 이것이 선법이다. 다만 즉석에서 깨닫지 못한다면 선사가 말한 뜻에 대한 것을 약간의 시간을 갖고 참구하면 결국 알게 되어있다. 한번 깨닫고 그리고 일평생 무념무심의 삶을 살아간다면 그가 바로 대평안을 얻은 사람이다.
그런데 말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농사를 짓고 직장을 다녀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런 ‘생계적 궁리’나 ‘일을 하는데 생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무념무심은 진리를 추구하는 측면이나 본질을 논하는 측면, 그리고 일상적 인간관계에서 망념(妄念)이 없는 것을 말한다.
당ㆍ송 시대에 수백 년 동안 선학이 하나의 큰 물결, 큰 사조와 같이 일어나서 선법이 융성했다. 그때에 완성된 선법은 1천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 수행자의 기본 지침이 된다.
이미 유포되어 있는 공안집 『벽암록』과 『종용록』은 매우 유용한 선서이다. 불교의 기본 상식 정도만 알면 누구든지 읽을 수 있고 선문의 기승전결을 알 수 있는 안내서이다. 원오 스님과 만송 스님은 그동안 선사들이 구술로만 전해오던 선법을 화두 거량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하면서도 선사들의 공안에 흠이 되지 않도록 안배했기 때문에 매우 절도가 있다. 가히 칼을 다치지 않고 상대를 감복하게 하는 일등 선사들의 기량을 가지고 쓴 글이라고 할만하다.
아쉬운 것은 두 스님은 자비가 지나쳐서 상세하게 설명하느라 문답과 주가 뒤섞이고 수시ㆍ평창의 옛 관례를 따른 것이 오늘날에는 번다한 것이 되었다. 또 간혹 설명이 장황하여 길이 많아지는 바람에 양(羊)을 잃어버릴 우려가 있게 되었다. 본래 조사들의 문답은 잎 따고 가지 쳐버리고 몸통을 보이려했던 것인데, 번잡함이 되레 조사의 뜻을 아는 것에 장애가 된 것이다.
본 『팽금록』은 『벽암록』과 『종용록』에서 선법의 기본 규칙과 핵심이 될 만한 시중ㆍ평창 많은 부분을 선별 인용했다. 인용하면서 번다함을 삭제하고 간략하게 한 것은 일견에 조사의 의지를 파악케 하고자 함이었다. 아울러 필요한 공안 여러 개를 추가했고, 한국 선사들 태고 스님, 경허 스님, 호은 스님 문답까지 넣어서 101칙으로 묶었다.
101칙 중에 36칙 앙산의 마하연법, 41칙 암두의 말후구, 46칙 낭월당공, 50칙 병정동자 등은 필자의 해부가 길게 기술된 곳이다. 이 중 46칙 낭월당공은 그동안 학계에서 계속 논의되어 왔던 ‘오매일여’에 대한 필자인 석우 스님의 관점(觀點)을 대혜 스님 어록을 통해서 그 실상을 밝히고, 또 여러 조사들의 견해를 넣어서 돈오보임(頓悟保任)이 진정한 선문의 이정표라는 것을 증명 제시했다.
백장(百丈) 스님은 “일체의 말(言)과 산하대지를 낱낱이 자기에게 돌이키라”라고 했다. 1천 7백 공안과 선사들의 많은 말과 설법이 있으나 그 어느 것도 자기와 관련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낱낱이 자기와 결부시켜보아야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낙처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독자들은 이러한 관점으로 이 책을 통해 간화선 공부의 특이점을 맞이하길 바란다.
(필자인 석우 스님의 자문자답이다)
조사의 의지를 묻는가?
“백일홍 나뭇가지 끝에 백화(百花)가 만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