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론
역사성과 서정성, 성찰과 존재의 시적 형상화
- 미래 서정시의 한 흐름, 양동률의 작품을 중심으로
이 지 엽
(시인·경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
1. 들어가면서- 새로움에 대한 탐색
느낌과 감성의 특별한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산물이 詩라면 탁월한 언어 선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번 시집에서는 시인만의 상상과 사색을 통한 시어 자체에 진정성을 내재하고 있어 통합적 미의식이 기대된다. 탁월한 독자성이 돋보이는 시를 통해 시인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시인은 시적 대상의 끊임없는 반추를 통하여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하나씩 실현시켜 나간다. 대개 자신이 추구하는 바는 본인의 성장 과정이나 소속된 일터, 일상의 관심 혹은 인식의 범주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과연 어떠한 것을 쓰면서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은 시의 척도가 될 것인가.
한 시인의 작품론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요즘에 접어들면서 시인의 시작詩作이 하루가 다르게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자신의 범주에 쉽게 매몰되거나 혹은 너무 동떨어져 상상의 공간에서 자신도 모르는 언어의 집을 짓고 있는 시인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양동률 시인은 새로움에 대한 탐색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길을 오롯이 지켜나가고 있다. “세월이 범람하는 저 돌무지에/ 사라지지 않는/ 시대적 안부, 꼿꼿하게 서 있”는 「돌의 힘」에서 뼛속까지 올곧은 역사의 거석문화를 읽기도 하고, 「수신하는 해조음」에서 “조금潮今과 사리의 시차 사이/ 깃을 세우는 갈매기처럼 계선주에 메어 놓은/ 나루터의 꿈”을 통해 “해변에서 육화되는 바다의 언어”를 만나기도 한다. “채마밭 옥수수나무가/ 빈집을 지키고 있다”에도 “바삭거리는 소리마다/ 흔들리는 모서리 잡고/ 휘적휘적 걸어 나오는” 「빈집」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읽어내기도 한다. 여기서는 양동률 시인이 추구하고 있는 시학의 의미를 조명한 뒤 그가 추구하는 문학적 지향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고결하면서도 미래까지를 내포하는 역사성의 시학
시인의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적 특징은 역사에 대한 인식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진도가 갖고 있는 유배문화권적인 부분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이야기지만 대부분이 역사주의를 표방하는 시편들에서 발견되는 상투성에서는 말끔히 벗어나고 있다.
바람의 옛길 진도에는
삼별초군이 지나간 창포길이 있다
별빛에 길을 물어
만길晩吉 고갯길을 넘다가
포강에 박꽃처럼 떨구어진 꽃잎의 흉터
엄혹한 격랑의 역사에
절의를 지킨 연모의 꿈자리로 남았는가
천 년 동안 그대로인 궁녀둠벙
어떤 외세에도 끄떡없다
꺾인 물살이 멈춘 궁녀둠벙에
전설 같은 바위를 돌아 나오며
삼별초군의 발자취를 읽는다
나비 옷 입고 몸을 던진 애환
굽이치는 물줄기 따라, 아린 꽃자리에
사계절 유영하는 고결한 향기
세월이 늙어서 더 빛나는 슬픔이
조용하게 관류하고 있다
- 「궁녀둠벙」 전문
시인의 고향인 진도에는 삼별초의 유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다. 그 중에 하나인 「삼별초 궁녀둠벙」에 관해 시인은 조곤조곤 들려준다. 서둘지 않고 옆 사람에게 읊조리듯 들려준다. 감정의 과잉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삼별초 궁녀둠벙은 시인의 고향인 의신면 돈지리에 있는 둠벙인데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정벌하기 위해 진도에 들어왔을 때 승화후承化侯 왕온王溫은 의신면 침계리에 있는 ‘왕무덤재’에서 붙잡혀 ‘논수골’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전투 중에 피난을 하던 여기女妓·급창及唱 등 궁녀들은 창포리에서 만길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만길재’를 넘다가, 몽골군에게 붙잡혀 몸을 더럽히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면서 언덕을 따라 내려가 둠벙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시인은 이를 “별빛에 길을 물어/ 만길晩吉 고갯길을 넘다가/ 포강에 박꽃처럼 떨구어진 꽃잎의 흉터”로 형상화한다.
진도대교에 진입하면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거친 물줄기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휘몰아치는 곳에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지축 울리는 북소리와
우렁찬 호령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두려움 앞에서도 뜻과 힘을 모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던
장군의 결기가 보인다
섬과 섬의 고도孤島에
혁혁한 승전의 기쁨이 있는
명량대첩의 찬란한 역사
계량할 수 없는 아픔과 울음이
커다란 물살이 되어 진도를 휘감고 있다
- 「울돌목」 전문
시인의 고향 나들목에 울돌목이 있고, 여기에는 명량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있다. 시인은 이 역사적 장소를 형상화하면서 실 감정의 표현을 삽입한다. “거친 물줄기가/ 끊임없이 솟구치고 휘몰아치는 곳에/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은// 지축 울리는 북소리와 우렁찬 호령소리”는 시대의 공간을 뛰어넘는 현장감이 있다. 대개 역사성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시원하게 돌파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알몸으로 살아가는 생이다
관청바위 능선을 따라 즐비한 돌
뼛속까지 올곧은 역사처럼
거석문화가 견고하다
구름도 비켜선 자리에
살아서 남은 표정들은 말이 없다
시간은 미래에서 온 듯
몸이 자꾸 들썩이는데
세월이 범람하는 저 돌무지에
사라지지 않는
시대적 안부, 꼿꼿하게 서 있다
- 「돌의 힘」 전문
화순 고인돌군을 보면서 시인은 「돌에 힘」에 대해 생각한다. “알몸으로 살아가는 생이다”라는 진술적 표현이 주목을 끈다. 왜 알몸인가에 대한 답은 “뼛속까지 올곧은 역사처럼/ 거석문화가 견고하다”라는 대목에서 확인된다. 말하자면 알몸으로 시대를 증언하고 진리처럼 표표히 우리 민족의 삶과 함께 해온 구체적 상징물이라는 것이다. 겉만이 아니라 “뼛속까지 올곧은 역사”의 존재이며 견고한 거석문화라는 것이다. 우리의 거석기념물은 선돌·고인돌·돌널무덤·돌무지무덤·환상석렬 등이 있다. 선돌은 사람과 관련 있는 것으로, 한 가족이나 씨족의 인물을 상징하기도 했고 고인돌은 하나의 뚜껑돌蓋石을 2개 또는 여러 개의 받침돌支石로 괴는데 묘소와 제단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시인은 이 견고한 거석문화를 통해 사람이든 장소이든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시대적 안부”를 물으며 “꼿꼿하게 서 있”는 돌무지에 대한 경의와 찬사를 보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은 미래에서 온 듯/ 몸이 자꾸 들썩”인다는 표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수천 년이 지난 장구한 세월을 지나 앞으로 미래 수천 년의 세월을 시인은 오늘의 시간으로 클로즈업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이 놀랍지 않은가. 시인의 생각하는 역사성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다 들어 있다. 단지 세기말적이고 행위적인 미래파가 아닌 새로운 미래서정시의 시간 흐름이고 역사인식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3. 순정하면서도 미래 확장적인 서정성의 시학
양동률 시인의 고결하면서도 미래까지를 내포하는 역사성의 시학 이라면 서정성은 순정하면서도 미래 확장적인 서정성의 시학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아득한
혼잣말이 세월을 넘나드는
도심 속 채석강을 걷는다
계림동 헌책방 거리의 간판들이
서로 비좁도록 기대고 서 있다
발걸음 뜸한 서점에 들어서면
촘촘하고 즐비하게 꽂힌
책들 사이 통로가 주상절리 같다
가만히 책을 들고 뒤적여보면
행간의 밑줄이 따스한 온기로 남아있다
오래전 손때 묻은 내용들이
탈색된 침묵을 감싸고 있다
빠듯한 공간에서 퇴적층을 헤치고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가
과거의 시간을 꺼내 놓는 듯하다
책은 책으로 포개지고 잇닿아 있지만
독백의 내용은 의미가 너무 크다
홀로 깊어지는 서해바다 고군산열도에서
갯바위 포말 속으로
흩어지는 환영이 켜켜이 쌓이고 있다
- 「책탑」 전문
시인은 계림동 헌책방을 채석강과 일치시킨다. 채석강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바위의 기묘한 형상 때문에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바닷물의 침식을 받은 화산성 퇴적암층은 사암과 이암의 교대층, 셰일, 화산회로 이루어진 이암의 층서를 나타낸다. 단층斷層과 습곡褶曲이 유난히 발달된 기암절벽이 십자동굴을 비롯하여 곳곳에 해식동굴海蝕洞窟을 형성하고 있는데 시인은 “촘촘하고 즐비하게 꽂힌/ 책들 사이 통로가 주상절리 같음”을 얘기한다. 헌책방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가만히 책을 들고 뒤적”이는 시선은 따뜻하다. “행간의 밑줄이 따스한 온기로 남아” “탈색된 침묵을 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퇴적층을 헤치고/ 들려오는 심장박동 소리”는 책 속이기도 하고, 켜켜이 쌓인 단층이기도 하다. 단순은유를 넘어서 확장은유를 구사함으로써 미래서정시의 바람직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
골목의 저물녘
거위가 날개를 퍼덕이는 잔디 위에
골프공이 포물선을 그어가듯
식탁 위로 날아오르는
저 거위 같은 노각
- 「거위 같은 노각」
나뭇가지에 앉은 새소리를 따라가다가
암반이 만들어 놓은 물줄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긴다
빠져나갔다 다시 모이는
대숲에 바람이 불고
사운 대는 댓잎의 장단에 맞춰
時視詩 시를 읊는다
- 「소쇄원을 읽다」
생각은 주머니 속에 호두알처럼
서로 간의 거리를 확보한다
- 「수상한 언텍트」
설화지雪花紙 같은 수평선 위에
해류의 손끝이 머문 지문으로
찰랑이는 파도 이랑,
푸른 당신을 각주 한다
- 「푸른 당신을 각주 하다」
시적대상에 대한 시인의 시적 묘사를 여실히 알 수 있는 몇 편의 작품을 인용해본다. 「거위 같은 노각」은 노각을 거위에 비유했다. 구상은 추상으로, 추상은 구상으로 비유하는 것이 더 선명하게 살아나는 법인데 구상을 구상으로 비유한 것이다. 노각은 늙은 조선오이 열매이다. 충분히 익어 진노란색 겉껍질에 그물 모양이 고르게 나타나며, 풋오이보다 껍질이 거칠고 조직에 수분이 적어 단단하다. 그러나 단맛이 있어 생채로 무쳐 먹거나 장아찌, 김치를 담가 먹는다. 시인은 노각을 보자 “갖가지 양념 버무려/ 군침 넘쳐날 듯한 새콤한 식욕이” 돋아나 노각을 거위가 날개를 퍼덕이며 골프공처럼 날다가 식탁 위로 날아오르는 것으로 비유한다. 얼마나 생동감 있는 표현인가. 노각과 거위는 거리가 멀다. 이처럼 구체적인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 비유될 때는 거리가 멀어야 표현이 참신하게 잘 살아난다. 「소쇄원을 읽다」에서 사운 대는 댓잎의 바람소리를 “時視詩 시를 읊는”것으로 그려낸 부분에서는 청각적 심상이 빛을 발한다. 「수상한 언텍트」 에서 사람의 생각을 서로 간의 거리를 확보하는 “주머니 속에 호두알”로 비유한 것도 묘미가 있다. 「푸른 당신을 각주 하다」에서 “설화지雪花紙”와 “수평선”의 관계, “해류의 손끝이 머문 지문”과 “찰랑이는 파도 이랑”의 관계도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들은 모두 미래서정시의 시적 묘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서정시이되 과거의 고답적인 서정시와는 확연히 다른 새로운 서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성찰과 존재성과 카이로스 지향의 미래 시학
우리는 양동률 시인의 역사성이 과거 현재 미래를 내포한, 다시 말해 미래 확장적인 시간관을 앞서 살폈다. 이점은 성찰과 존재에 대한 남다른 인식을 전제하고 있는 점에서 보다 더 세밀한 접근이 필요하다.
끝도 소실점도 없는 당신
산과 온 들판의 가슴에
알록달록한 무늬 새기고
휘파람 불며 잘도 간다
빛과 어둠 속에 익어가는
크로노스 시간이
붉은 대추 알 같이 익어 가고
운세만큼 어긋난 길에서도
카이로스 시간은
생의 맥박을 뛰게 한다
존재의 자각을 깨우며
눈부시게 살아내는 힘이
연연하게 초침과 함께 흐른다
- 「시간이라는 당신」 전문
끝없는 창공
접었다가 펼쳐가는 날개가
곡선을 만든다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의 당신은
맨발로 넘나드는 흰나비 떼
마법 같은 밀실의 집에
눈부신 시간마다
다채롭게 감정이 오고 간다
아무 흠도 없는 작은 별들이
싱싱하게 자라나는 내 안의 언어
계절을 넘나드는 당신은
보이지 않는 우화의 집이다
- 「나비의 방」
그리스인들은 두 가지 시간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과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물리적 시간으로 객관적·정량적 시간이다. “빛과 어둠 속에 익어가는/ 붉은 대추 알 같이 익어가는”은 볼 수 있고 계량적인 시간이다. 반면, 카이로스의 시간은 질적인 시간으로 주관적·정성적 시간이다. “운세만큼 어긋난 길에서도/ 생의 맥박을 뛰게 한다는” 다분히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정성적 시간이다. 인간에게 시간은 사람에 따라 다소 길거나 짧을 수 있지만 모두 공평하게 주어져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그것은 크로노스의 시간일 수도 있고, 카이로스의 시간일 수도 있다. 크로노스의 시간보다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은 보다 질적으로 행복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판단된다. 우리가 인생을 의미있게 산다는 것은 인간에게 물리적으로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을 질적인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꿀 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한 사람의 운명과 인생의 성패를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찾아내지 못하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즐길 수 없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우리 삶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를 사는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사는 사람이다. 현재는 과거를 비추고 미래를 준비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과거의 회한과 미래의 불안 때문에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느라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다. 과거와 미래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시간은 현재뿐이다. 크로노스의 시간은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 시간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크로노스는 미래에 자식이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될까 봐 자식을 잡아먹는다. 그 결과 그는 현재를 제대로 살 수 없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자비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과거로부터 흘러와서 현재를 삼키고, 또 미래도 집어삼켜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공허하고 무의미한 삶을 사는 이유는 어제의 기억과 내일의 준비에 갇혀 오늘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들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살면서 시간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후회로 인해 과거에 얽매이고, 두려움으로 미래에 사로잡혀 살다가 결국 자신도 크로노스의 희생물이 된다.
기회는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현재에 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시간은 영원히 현재에 머물러 있다. “존재의 자각을 깨우며/ 눈부시게 살아내는 힘이/ 연연하게 초침과 함께 흐르는” 현재는 중요하다. 동시에 “아무 흠도 없는 작은 별들이/ 성성하게 자라나는 내 안의 언어”로 전환시킬 모티프의 언어도 중요하다. “마법 같은 밀실의 집에/ 눈부신 시간마다/ 다채롭게 감정이 오고 간다” 「나비의 방」에서 시간의 눈부심이 나비를 날개였다고 설파한다. 폭넓게 육화된 언어는 읽는 순간 나비로 환생하여 계절을 넘나든다. 모든 것의 선험적 바탕은 사랑이고 사랑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다.
물끄러미 천정을 바라본다
한가위 이른 아침
아무 흠도 없는 작은 별들이
성성하게 자라는 시간이다
동네 한 바퀴를 돌아오다
앞산의 그네와 강강술래 소리가
문밖 멀리 풍경처럼 서 있다
어머니와 빚는 송편이
가마솥 솔잎 위에서 익어가고
마루에서는 아버지의 기침 소리
늘 윤기 나던 복된 한가위였다
나만의 그리움을 가만히 꺼내서
이른 아침 홀로 쳐다보다가
인기척이 들리는 창문을 열어보는 순간
문밖에서 누군가 내 안의 문을 두드린다
형체 없이 사라지는 형상들
한가위 아침에 부재중인 안부를 묻는다
- 「누군가 내 안의 문을 두드린다」 전문
시집의 표제작인 「누군가 내 안의 문을 두드린다」 역시 성찰과 존재의 시학적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시인은 “윤기 나던 복된 한가위”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앞산의 그네와 강강술래” 아버지의 기침소리, “가마솥 솔잎 위에서 익어가”는 송편의 내음 등 시각과 청각과 후각을 통해 그 기억은 시인의 영원한 고향,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일. 지금은“형체 없이 사라지는 형상들”이다. 그러나 사라졌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과거의 그것을 꺼내 한가위 “이른 아침 홀로 쳐다”본다. “문밖에서 누군가 내 안의 문을 두드린다”. 나는 안녕한가, 나의 존재는 부재중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기억의 통로 출구에서 시인은 자아에 대한 성찰적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캄캄한 광장으로 옮겨 가는
저 하얀 무리
내 안의 안개는 몇 그램일까
숨 가빠지는 시간
자욱한 안갯속을 빼곡히 운집한
셀 수 없는 거리의 촛불로
사방이 둘러싸인 25시다
슬픈 계급을 표시하는 듯한
검은 리본, 공중에 난무
안개 같은 사람들이 엄숙하게 행진한다
촛불이 들풀처럼 일렁이며 깜빡거린다
만져보거나 껴안아 볼 수 없는 안개
어둠과 빛은
가릴 수 있어도 지울 수는 없는 것
힘에 밀리는 무리들이
스크럼 짜고 구호 외친다
사위어 가는 거리의 촛불
북악의 푸른 기왓장과 광화문 안개는
도대체 몇 그램이나 될까
하루 끝에 서서
찬찬히 내 안 바라보는 중이다
- 「안개는 몇 그램일까」 전문
“힘에 밀리는 무리들이/ 스크럼 짜고 구호를 외”치고 “슬픈 계급을 표시하는 듯한/ 검은 리본, 공중에 난무”하는 공간에서 시인은 “내 안의 안개” 그 존재에 대해 생각한다. 자아는 “만져보거나 껴안아 볼 수 없는 안개”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까무룩하게 없어지거나 사라질 존재에 대해 번민의 아픈 성찰을 하고 있는 자아의 모습이 선연하게 다가온다. 「나부끼는 소회」에서는 “범람하는 고층 아파트의/ 제비집 같은 거실에 앉아/ 슬픔이 안쪽에서 발아되는 순간/ 탁자에 접어놓은 핸드폰 매만지다/ 우두커니 겨울의 나들목 길에/ 내 안의 달빛”에서 무성하게 숨쉬고 있는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물의 숲을 걷다」에서는 “차거나 뜨겁게 상처가 씻겨나가/ 꽃으로 피어오르는 은신의 처소/ 비로소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것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세상을 헤쳐나가는 지친 발목이/ 흰 거품에 족적을 묻기도 한다”와 “생각나는 젖은 이름들”에서 찾아내기도 한다.
5. 장단호흡의 조절과 유연함의 미래서정시학
양동률 시인은 하나의 작품을 직조하는 데에도 어조에 대해 상당한 신경을 쓰고 있다. 아마 시낭송을 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지만 우리말이 가지는 호흡의 장단완급을 조절하고 자연스러운 가락의 흐름을 유도하기 위해 적지않는 노력을 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1. 산등성이에 구름이 살고 있다(3)
2. 바람꽃이 골짜기마다 피고 지는(3)
3. 무성한 산줄기의 분수령(3)
4. 솟아오른 산봉우리 골짜기 짚어(3)
5. 선현들이 길을 만든 지 수 천년이다(4)
6. 굽이치는 등선 낙동강의 첫 물줄기가(4)
7. 척박하여도 넘어야 했던 고갯길은(3)
8 사람 떠난 자리에 텃새가 살고 있다(2)
---------------------
9. 문경새재 비껴가는 구름 아래(3)
10. 맑은 물 품고 가는 문설주 넘어(3)
11. 교귀청 뜰아래 버들치 갈겨니가 떼 지어 놀고(5)
12. 조산과 무주암 능선에는 층층나무(4)
13. 야광나무가 바람의 빛깔에 꽃잎 날린다 (3)
14. 수묵화 같은 옛길을 유추하며(3)
15. 또박또박 고갯길 손잡고 가는(3)
16. 길섶에는 그리움의 감정이 데워진다(4)
17. 아득히 등 굽은 문경새재(3)
18. 새들도 날다가 쉬어가는 고갯길(4)
------------------------
19. 아 아 아버지의 아버지가 밟고 넘는(4)
20. 발자국 소리에 지팡이가 넘는다(4)
21. 흩어지는 마음의 씨앗 바랑 속에 쓸어 담은(5)
22. 굽이굽이 등 굽은 새재를 읽는다(4)
23. 범접할 수 없는 옛길의 경전이다(4)
-「지팡이가 문경새재를 넘는다」전문
*번호는 편의를 위해 부여, 괄호 안은 (음보 수)
총 23행으로 짜인 이 작품은 크게 세 단락으로 나뉜다. 첫 단락(1행~8행)은 도입부로 문경새재의 장소적 의의가 둘째 단락(9행~18행)에서는 문경새재의 맑은 산천경계와 흥겨움, 물고기와 나무들의 군락과 현재적 의미가 전개되고 있으며, 셋째 단락(19행~23행)은 마무리로 세월의 흐름 속에 유구한 문경새재의 모습이 초점을 이루고 있다. 총 23행의 음보수는 다음과 같다.
2음보-8
3음보-1,2,3,4,7,9,10,13,14,15,17
4음보-5,6,12,16,18,19,20,22,23
5음보-11,21
가장 짧은 음보가 8번째 행이고 가장 긴 5음보가 11, 21번째 행이다. 가장 지배적인 음보는 3음보로 11행으로 43.4%를 차지하고 4음보가 9행으로 39.1%를 차지한다. 결과적으로 3음보와 4음보의 비율이 86.9%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국인이 가장 즐겨 쓰는 음량의 단위라는 점에서 아주 보편적인 호흡을 보여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음보는 4음보에 비해 덜 안정적이며 빠른 템포로 활동적이다. 5음보는 4음보보다 유장함이 있어 다소 늘어지는 느낌을 준다, 이 3, 4, 5음보를 효과적으로 엇갈려 씀으로써 호흡이 주는 단조로움을 최대한 제어하면서 변화를 유도하고 있는 것이 주목된다. 1행부터 8행까지는 처음은 가볍게 시작하면서 살짝살짝 터치하면서 경쾌함을 유발하고 있고 (3-3-3-3-3-4-3-2-3) 중반부인 9행부터 18행까지의 중반부에서는 버들치, 갈겨니, 층층나무 등의 열거에서는 음보수가 늘어나더니 (3-4-3-4) 단조로움에 다소 빠른 걸음으로 주변 경계를 훑고 나서 완만함으로 변화를 유도한다. (4-4-5-4-3-4) 19행에서 23행까지는 초반의 절정(“아 아 아버지의 아버지가 밟고 넘던”)에 포인트를 두더니 이내 안정적인 호흡을 계속 유지하면서 여운있게 마무리되고 있다.(4-4-4-4) 낭송시로서의 전범으로 삼을 만하다. 여기에서 구태여 시의 형태를 문제 삼아 얘기하는 이유는 양동률 시인이 지향하는 미래서정시가 미래파시인의 난삽하고 산문적인 시쓰기와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예증해 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6. 나오면서- 미래 서정시의 한 흐름
요컨대 양동률 시인의 작품은 고결하면서도 미래까지를 내포하는 역사성의 시학이며, 순정하면서도 미래 확장적인 서정성의 시학이다. 동시에 성찰과 존재성의 카이로스 지향의 미래 시학이며 장단호흡의 조절과 유연함의 미래서정시학이다. 나는 이번 앙동률 시인의 『누군가 내 안의 문을 두드린다』는 일군의 작업적 성과를 넘어서는 미래서정시의 중요한 흐름으로 평가하고 싶다. 남도의 양동률 시인이 “뼛속까지 올곧은 역사처럼” “붉은 대추 알” 같은 “생의 맥박”처럼 가열차게 열어가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