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문학사상 가장 현대적인 고전
섬세하고 투명한 사색의 언어
자코모 레오파르디(Giacomo Leopardi, 1798~1837)의 작품을 국내 최초로 완역한 《노래들》이 출간되었다. 레오파르디는 이탈리아 문학사에서 단테와 페트라르카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자 사상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고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 한계를 과감히 벗어나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혁신을 감행했다. 이를 통해 이탈리아 시 세계의 지평이 비약적으로 확장되었다고 평가된다.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교황령의 소도시에서 자란 그가, 고전과 낭만의 경계에 선 채 자신만의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해 내면서 당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이고 자유로운 시인이 되었다. 그러한 파격을 완성해 낸 것은 바로 레오파르디의 섬세한 표현력과 서정성이다. 이탈리아 문화원장 안젤로 조에의 표현에 따르면 레오파르디는 “황홀한 후광, 꿈처럼 투명한 분위기의 기억 속에서 대상들의 복원을 함축한다.”
또한 레오파르디는 작품에 담아 낸 사상의 깊이와 선도성으로도 역사적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자연과학, 신학, 철학 등 각종 학문을 섭렵한 그는 방대한 지식과 철학적 연구를 통해 비관주의와 실존주의를 선도하는 등 수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세기 쇼펜하우어는 레오파르디를 일러 자신의 ‘영적 형제’라고 표현했으며, 20세기 이탈로 칼비노는 레오파르디가 자신이 쓰는 모든 글의 원천이라고 지목하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오늘날까지도 레오파르디의 작품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며 현재형으로 읽힌다.
한 권의 책으로 온전히 다가온 레오파르디
고통과 시간의 심연을 건너는 노래
《노래들》은 레오파르디가 평생에 걸쳐 쓴 시들을 묶은 그의 마지막 시집으로, 시인의 내적 여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초기 시에서 그는 고전적 이상을 동경하며 좇지만, 자연의 무관심 속에 버려진 인간의 운명을 자각하면서 점차 기대와 환멸,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커져 가는 내면의 균열로 시선을 돌린다. 시집 속 작품을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그러한 움직임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송되는 대표작 〈무한〉은 고요한 언덕에 앉아서 무한을 응시하는 유한한 인간의 성찰을 보여 주며, 〈아시아 유랑 목동의 야상곡〉에서는 대답 없는 달과 양을 향한 목동의 질문이 허공에 흩어지며 존재의 부조리를 형상화한다. 그런가 하면 레오파르디의 정신적 유언으로 여겨지는 후기 대표작 〈금작화 또는 황무지의 꽃〉은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서 피어난 금작화, 죽음 외에는 고개 숙이지 않을 연약한 생명체를 그린다. 이 작고 여린 꽃을 통해, 그는 냉혹한 자연 속에서 고통스럽고 초라해 보이는 삶을 살아가는 지상의 존재들에게 마침내 경의를 드러낸다.
이러한 사유 여정이 담긴 《노래들》의 역자 김운찬 대구가톨릭대 명예교수는 단테의 《신곡》 등 수많은 이탈리아 고전을 옮겨 왔으며, 간결하면서도 시어의 의미를 살린 번역으로 레오파르디의 목소리를 온전히 전달했다. 이로써 그동안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어 왔던 레오파르디의 시 세계가 비로소 한 권의 책으로 드러난다. 《노래들》은 다만 고통을 받아들이며 어떠한 선언도 없이 그저 읊조린다.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의 부조리, 삶의 무의미함, 그럼에도 이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생명체에 대한 경의…. 이 목소리는 시대를 넘어 우리에게까지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