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첫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울력, 2024)를 여는 첫 시 「반도여 안녕 1」에는 ‘망명객’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약력에 따르면 시인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듬해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에 귀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부끄러워 얼굴 가렸어요/아 배 밖으로 튀어나온 아기 얼굴 팔레트/바깥으로 금남로가 보였지요”(「붉은 팔레트 속의 광주」, 『반도여 안녕 유로파』)라는 시의 진술에서 짐작할 수 있듯, ‘5・18 광주’의 참상은 깊은 정신적 상처이자 부채감으로 시인의 ‘망명 의식’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첫 시집 곳곳에는 이국에서 보낸 그 힘겨운 고투의 시간이 담겨 있다. 이후 비판적 지성의 연마, 독문학자로서의 삶이 지식인으로서 그 빚의 일부나마 갚기 위한 시간이었다면, 그 과정에서 어떻게 해도 해소될 길 없는 실존적 고뇌와 갈증이 ‘시’의 형식으로 오랜 시간의 잠복을 거쳐 우리에게 뒤늦게 도착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언어가 바로/망명객의 감옥”(「나의 모국어는」, 『반도여 안녕 유로파』)이라는 구절에는 영혼의 출구로서 ‘모국어/시’의 자리가 갖는 절실함이 아픈 역설로 맺혀 있다.
두번째 시집 『내 영혼 그대의 몸속으로』에 실린 시편들 역시 첫 시집과 탄생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인은 자서에서 “오랜 세월 고이 간직한 미발표작 가운데 주로 사랑과 관련되는 시편을 골라보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우리는 시를 읽어나가면서 ‘사랑’의 주제가 ‘타자’ 혹은 ‘타자성’에 대한 여러 층위의 질문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시인 스스로 “영혼의 접붙이기, 혹은 빙의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이고 있는 그 시학의 핵심에는 ‘시적 화자’의 관점을 ‘시적 대상’으로 옮기는 일이 자리하고 있다. 시인의 ‘망명 의식’이 한반도와 독일 양쪽에서 자신을 타자로 앓는 시간과 깊이 이어져 있다고 한다면, 이 같은 시적 방법론의 연원을 짐작해보게도 된다. 그런데 ‘시적 대상’의 자리로 옮겨가서 그 대상의 관점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일이 단순한 시선의 교환과 이전에 그친다면, 그것은 인위적이고(artificial) 형식적인 소외의 극복은 아닐까. 식물 혹은 동물에게 시선과 목소리를 부여하는 일은 상투적인 의인화의 시적 기술과 어떻게 다른가. 이 과정에서 인간중심주의나 타자성의 벽은 역설적으로 더 공고해지지는 않을까. ‘사랑’이 타자의 낯섦과 혼돈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견디는 일이라면, ‘빙의의 시학’은 타자를 ‘시적 화자/주체’로 익숙하게 길들이는 일과 어떻게 다른가.
시집의 첫 시 「참제비고깔」은 시인의 시학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통상적으로 대상의 자리에 놓이는 참제비고깔에게 인간과 동등한 시적 화자의 자리를 부여하여 욕망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해놓았다. 참제비고깔의 ‘푸르께한 꽃잎’ ‘가지의 털’ ‘초록 잎사귀’ ‘꽃주머니’는 각각 눈, 귀, 손, 혀가 되어 ‘당신’을 사랑하고 욕망한다. 참제비고깔이 인간 중심의 위계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타자성의 구원이라고 한다면, 빙의의 시학이 목표로 하는 지점이 비교적 뚜렷하게 감지된다. 이때 네 개의 연에서 그 사랑의 욕망이 밀쳐지고 중단되고 좌절되는 모습이 반복되고 변주되는 양상 또한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사랑이 감내해야 하는 보편적 정황처럼 보이며, 참제비고깔의 사랑은 (인간의 그것처럼) 비극적으로 정화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나’는 빙의가 완료되어 참제비고깔이 된 시적 화자가 아니라, 그 빙의를 욕망하는 시선으로 읽히기도 한다. “푸르께한 꽃잎은 나의 눈” 다음에 “당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그만큼/당신 얼굴 감감해지는 까닭은”이 이어질 때, 당신과의 거리뿐만 아니라 빙의의 거리 또한 밀려나고 있다. 이 순간 참제비고깔은 손쉬운 의인화에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자성을 길들이는 것은 사랑이 아닐 것이다. 지금 이 시가 ‘바로 보고’ ‘엿듣고’ ‘만지고’ ‘더듬고’ 싶은 존재는 있는 그대로의 ‘참제비고깔’은 아닐까.
이번 시집에는 참제비고깔 말고도 여러 풀꽃, 식물이 나온다. 반딧불이, 메뚜기, 사향노루의 목소리로 노래하는 시도 있다. 신화나 역사 속 인물들도 빙의의 시학을 통해 목소리를 얻는다. 오래 떠나 있다 돌아온 고향의 풍경 앞에서 시인은 잠시 오디세우스의 시선을 빌리기도 한다. 그림자섬 영도를 배경으로 어린 시절의 시간이 돌아오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시집의 시편들은 먼 거리, 오랜 시간의 기다림과 그리움을 품고 있다. 그 아득한 지평이 시인에게는 빙의의 시학이 움터온 시의 터전인 듯하다. “차마 고백할 수 없었던/수평선 너머 가족의 기다림/그래도 깨달았지요 사랑은 치렁치렁/자라는 넝쿨 한 줄기라는 것을”(「굿바이 칼립소」) 시인은 저 ‘넝쿨 한 줄기’에게 사랑의 시선과 언어를 양도하는 방식으로 시의 언어를 찾아간다. 이제 ‘넝쿨 한 줄기’는 오랜 사랑의 대상으로, 새로운 사랑의 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타자의 아픔이 있는 곳, 그곳이 시인의 기다림과 그리움이 자라난 자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