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연락이 끊긴 동지에게
너는 충실했을 뿐이야
뒤늦은 답장을 띄워 보낸다면
삶의 종착지가 아니라
종점을 마음에 품고
버스에 오르는 삶
끝까지
끝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다”
김현 〈충실한 슬픔〉 중에서
김현은 보이는 것보다 더 멀리 있으며 언제나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나만 꿰뚫어 본 것 같아 종종 기쁘지만, 실은 현을 아는 모두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 어떻게 보면 현을 아는 이들은 같은 기쁨을 공유하는 것이다. 현은 그런 우리를 가만히 응시하고, 그 모습은 보이는 것처럼 썩 가까우며 언제나 웃는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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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진이가 파란 벽에 기대어 서서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좋아한다. 어느 여름, 손님이 많은 시골 막국숫집에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내가 폴라로이드로 찍은 사진이다. 그 사진에는 그날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바람결, 흙내음과 지오다노 모델처럼 자세를 취한 욱진을 보며 웃던 친구들이 보이지 않게 보일 듯이 찍혀 있다.
“그럼에도 드물고 아름다운
이를테면 여름 저녁 하늘 같은
그런 장면 앞에 선 순간에는
부르고 싶은 마음을 참고
지는 해는 오래 바라보아도
눈이 시리지는 않겠지
하지만 감았다 뜨면 눈앞에
동그란 잔상은 어슴푸레
물에 잠겨 있는 한 사람이
입 밖으로 내는 목소리같이”
전욱진 〈역광〉 중에서
한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사이에 우리는 시시껄렁한 얘길 주고받는 대신 자못 진지한,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살고 싶은가에 관해 이야기 나눴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창 밖을 보면서, 산란하는 빛을 각자 음미하면서. 나는 지금도 종종 그 우연이 선사한 깨끗한 기쁨을 떠올린다. ‘욱진과 현’이라는 우정의 징표로 여겨봄 직한 것이다.
“욱진아, 저기 서봐.”
살면서 이 말을 몇 번쯤 더 할 수 있을까?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말의 횟수를 헤아리다 보면 늘 인생이 짧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어느새 상대에게 꼭 그 말을 들려주려 애쓰게 된다. 그렇지 않니? 하면 그래요? 하며 욱진이는 어떤 말을 보탤까. 궁금하기에 우정의 책장은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