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지우의 시는 전통적 서정시와는 전혀 다른 형태와 세계관으로 충격을 주었고, 그 충격을 경험하며 우리는 또 다른 시의 지형을 디뎌볼 수 있었다. 1980년 5월 광주, 분단, 군사독재와 같은 당대 중요한 상황이 이 시집에서 콜라주, 몽타주, 일상 기록 재배치 등의 실험적 기법들로 아카이빙돼 출현한다.
황지우는 배제된 것들, 파편화된 것들을 기록하면서 비시적(非時的)인 ‘잔해’들을 건져 올린다. “황지우가 아니라면, 저 버려지고 무의미한 언어들이 시적인 것으로 재출현하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라는 황지우의 수행문은 한국 현대시의 가장 급진적인 선언이다”(이광호 문학평론가).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어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부분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이다”라는 시구는 일반 서정시의 세계관에서 비껴 서 있다. 얼핏 서정시로 보이는 이 시를 깊이 들여다보면, 나무는 주변 환경의 도움을 받아 수동적으로 성장하는 요소가 아니라 자신의 ‘내재적’ 힘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즉, 인간이 중심인 세상에서 인간만이 움직이고 그 밖의 생태가 인간에 의지하는 것이 아닌, 세계 속에서 각자 움직이며 동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시인은 ‘자기동일성’으로 구축되어온 기존의 규범을 해체하여 말하지 못하는 것들에 미적 형태를 부여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시집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출몰하고 있다.
벗이여, 이제 나는 시를 폐업 처분하겠다. 나는 작자 미상이다. 나는 용의자이거나 잉여 인간이 될 것이다. 나는 그대의 추행자다. 아아, 나는 시의 무정부주의를 겪었고 시는 더 이상 나의 성소(聖所)가 아니다. 거짓은 나에게도 있다. 우리는 다시 레이건 치하에서 산다.
-「근황」 부분
친구에게 근황을 전하는 이 시의 언어들은 무분별하고 무규칙적이며 개인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이 혼재돼 있다. 잡다한 부산물이 시적 맥락 안에서 낯설게 배치됨으로 인해 독자들은 늘 일상에서 보던 흔한 언어가 시적인 형태로 읽히는 체험을 한다.
황지우의 시는 시인의 손에서 매듭지어지지 않고 열린 채 독자에게 건네지는데, 시를 읽은 사람이 그것을 해석한 다음에야 비로소 시의 의미를 획득한다. 이때 독자에게 넘겨진, 읽는 이로서의 역할은 보이지 않지만 시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한다. 그럼으로써 독자들과의 사이에서 전에 없던 새로운 관계, 능동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기존의 독법을 부수고 읽는 이를 시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당기는 이 시집은 한국 시사에 ‘황지우 열풍’을 불러일으켰으니, 그의 시를 읽는 이들이 있는 한 끊임없이 이 세계를 두드릴 것이다.
황지우가 “문학과 정치는 동시대의 말을 공유하고 있다”라고 했을 때, 그 진정한 함의는 그 말들을 발설한 시대 이후에 더욱더 풍부하고 예리한 것이 되었다. 그것이 시와 정치의 영역을 구별 짓는 지배의 언어에 대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졌던가를 묻는 것은, 과거가 아닌 동시대에 관한 것이다. 황지우의 시는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시간으로 지금도 날아가는 중이다.
-이광호, 해설 「동시대적인 것들의 ‘엑스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