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하림은 196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빈약한 올페의 회상」이 당선되며 문단에 나왔다. 『우리들을 위하여』에는 등단작을 비롯해 총 59편이 4부에 나뉘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이번 R 시리즈에서는 1976년 초판본의 차례를 따르되, 2010년에 출간된 『최하림 시전집』에서 시인이 생전 마지막으로 검토하여 수정 후 수록한 시를 최종본으로 삼았다. 전집에 수록하지 않은 시의 경우에는 초판본에 수록된 것을 가져왔다.
가장 첫번째에 놓인 시 「설야(雪夜) 1」에는 “수많은 노두(露頭)를 건너서”라는 시구가 나오는데, 여기서 ‘노두’란 광맥, 암석이나 지층, 석탄층 따위가 지표에 드러난 부분으로 광석을 찾는 데에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 시집을 최하림 시 세계의 본원이 펼쳐지는 ‘노두’와 같은 시집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대여 그대여 어떻게 저 먼 밤을 뚫고 가겠는가
바위 속같이 캄캄하고 팍팍한 수십만 리 길을
그대 홀로 어떻게 가 보이겠는가
가다가 쓰러지고 피 흘린들
누가 염습이라도 해주겠는가
괴로움이 비늘처럼 번쩍이면서 목을 조르고
마을 불빛도 모두 꺼져 어둠 속으로 잠겨 들어가는데
-「시인에게」 부분
[……] 펑펑 내리는 눈이여 우리들이 밟고 가는 눈이여 거부로 들끓는 한 사나이는 피 어린 언어를 토해내지만 칼끝을 걸어가는 아픔을 가지지 못한 언어는 칼끝에 결코 미치지 못한다 언어는 칼일 수 없다 [……]
-「눈」 부분
두루 알다시피 최하림은 1962년 김승옥·김치수·김현 등과 함께 동인지 『산문시대』를 통해 활동한 바 있고, 이는 4·19세대의 새로운 문학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4·19세대 문학의 대표적인 이념형은 자유와 사랑이다. 그런데 그 자유는 그냥 얻어지거나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거센 바람과 눈보라를 헤치고 나가야만 간신히 열리는 지평이었다. 사랑의 세계 또한 ‘노예 언어’ 같은 말을 버려야 열릴 수 있는 곳이었다.
죽음 같은 겨울의 시간을 건너 봄의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이 같은 고투는 이 시집 전반에 걸쳐 계속 출현한다. 어둠의 상황은 시집 곳곳에서 “바닷가 안개 풍경” “눈 내리는 숲속 어두운 풍경” “강가의 안개 풍경” 등으로 변주되며 그렇게 엄혹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사리(事理)”에 눈길을 두며 “어둠 속으로 들어가 어둠이” 되고 “어둠의 빛이”(「어둠의 노래」) 되어 어둠에 스며들거나 그 어둠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들에서 흐르는 바람이여
노래하고 노래하라 노래가 더욱 하늘을 넓히고
벌거벗은 힘이 흐르는 밤을 전율하게 할 때까지
노래하고 노래하라 어두운 바람이여
저녁마을의 어스름같이
노래는 넘쳐흘러 들을 적시고
들을 생생하게 하고 [……]
-「풍요」 부분
최하림은 “말들이 안개 속에 있었다”(「웃음소리」)라고 쓰며 어둠과 상처를 넘어 자유와 사랑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찾고자 했다. 고통 같은 암흑을 더욱 어둡게 하는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한 오라기 희망도 발견되지 않는 곳에서도, “들에서 흐르는 바람처럼” 스스로 바람의 시인이 되길 소망했다. 『우리들을 위하여』에서 시작된 그 바람의 길은 2010년 4월 시인이 타계할 때까지 그의 생을 통해 지속되었다.
바람이 어두운 밤을 전율케 하고, 바람의 노래가 들을 적시고, 들을 생생하게 할 수 있다면, 시가 그럴 수 있다면, 하는 소망으로 최하림은 오랜 시적 수행을 해왔다. 그런 가운데 바람은 질문을 낳고, 질문은 바람을 낳았다. [……] 최하림이 뿌린 시의 씨는 무진장 꽃들로 피어났다. 다시 들어도, 다시 읽어도, 그의 바람의 노래는 꽃들로 피어난다.
-우찬제, 해설 「‘무적’의 심연으로 내려가는 바람의 노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