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헌석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1 - 포크레인을 조종하며 보낸 고단한 세월에도 감동적인 시를 꾸준히 지었는 바, 그의 시들은 진정한 의미의 정갈한 노동요로 기능하리라 믿습니다. 노동 현장에서 퇴직한 시인이 여유롭게 지내려니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의 고희(古稀, 70세)에 다시 조우(遭遇)했을 때, 그는 요양보호사 교육을 받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요양 보호를 받아야 할 70대 노인이 누구를 ‘요양보호’하려고 합니까?” 그러자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아직 팔팔하다고 싱긋 웃었습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그는 중증 환자를 돌볼 수 있는 교육까지 이수하며, 전문 요양보호사가 되었고,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그는 요양병원에 취업하여 환우들을 돌보는 ‘간병사’로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습니다. 돌보는 일에 성실할 뿐만 아니라, ‘간병일지’를 타이틀로 지은 노동 현장시를 모아 새 시집을 발간하여 독자들과 생생한 감동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2 - 일인다역을 실천하는 요양병원의 간병사는 〈더 낮게 흘러/ 바다로 향하는 사람들(환우들)〉의 쇠잔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짧아진 영혼의 심지를 돋워주기도 합니다. 가끔은 피곤한 허리를 펴고 창밖 하늘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쉴 때도 있지만, 돌아서면 환우들을 위해 거칠어진 손을 분주하게 움직입니다. 마음의 상처를 스스로 다독이며 갈무리하는 사람들이 간병사입니다. ‘희생’이나 ‘보람’의 중심에 설 수 없을지라도 그들은 주어진 몫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알 수 없는 뿌듯함〉으로 스스로 위로가 되는 사람들이기에, 때로는 어머니의 따스한 역할도 자청하여 맡습니다.
#3 - 서사(敍事)가 감동적인 스토리로 전개되면, 독자들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함께 울음을 터뜨릴 것입니다. 「짝 잃은 기러기」가 그러합니다. 면회실에는 환우의 여동생 혼자 있습니다. 귓속말로 〈오빠의 아내분께서 많이 편찮으신가요?〉 물었더니,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났어요.”라는 대답입니다. 〈초점 잃은 눈으로/ 자주 허공만 응시하며 멍한 채/ 움직임이 조용했던 짝 잃은 기러기〉에게 그 소식을 알려야 하나, 아니면 모르게 해야 하나, 이것이 간병사 시인에게 숙제로 남습니다. 그리하여 〈열린 창 안으로 들어온 꽃바람/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는 애달픔의 정서를 찾아내는데, 이러한 연민의 정서가 휴머니즘(humanism)으로 승화됩니다.
#4 - 박승범 시인은 해병으로서 국방의 의무를 다한 자부심이 강한 분입니다. 그래서였을까, ‘요양병원 일지’에서 〈병색 짙은 예비역 중령, 전선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 내던졌을 노병/ 환자복에서 군복 냄새가 난다〉고 따스한 정서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경우를 결합합니다. 〈피 끓는 생도 시절/ 척추 부상을 피할 수만 있었더라면/ 최전방 어디선가 한 번쯤은 마주했을/ 선배 장교 같기도 해 손길이 더 갔지만/ 상처는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고 밝힙니다. 그 환우는 자신의 병명이 무엇이냐고 묻지만, 그리하여 간호과를 찾아가 병명을 알아냈지만, 희망의 정수리에 찬물 끼얹을까봐 끝내 침묵하였다고 술회합니다.
#5 - 노동 현장의 실상을 시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서사를 앞세운 스토리, 그리고 여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붙여 시를 장황하게도 합니다. 그렇지만 박승범 시인의 시집에는 몇 편의 장시(長詩)와 몇 편의 단시(短詩)가 있을 뿐 대부분 20행 내외의 길이가 대종(大宗)을 이룹니다. 그 중에서 극도로 짧은 단시를 먼저 감상합니다. 〈아무도 모르게/ 옷을 갈아 입으려다/ 들켜버린 산// 얼굴이 붉어지네〉(「가을산」 전문) 시인의 순정한 정서가 담긴 작품입니다. 특별히 보탤 말이 없을 정도로 단정하고 깔끔한 작품입니다. 이 시를 감상하며 만산홍엽(滿山紅葉) 사진이나, 외로이 붉게 물든 단풍 사진을 함께 연상하면 아름다움이 배가(倍加)될 터입니다. 물질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디카 시인(Dica poet)들의 사진 작품과 조응하면 절묘한 감동이 생성될 터입니다. 극도로 짧은 시는 아니지만, 8행의 작품에 교양 높은 환우의 언설(言說)을 ‘역설적 몰가치(沒價値)’ 혹은 ‘착상의 경이(驚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