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두자 시인의 시집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겼다』는 개인적 기억과 사회ㆍ역사적 상흔 그리고 내면의 심연을 섬세하게 엮어낸 시집이다. 이 시집은 제목이 암시하듯, 이별이라는 사건이 만들어낸 감정의 먼 지평을 탐색한다. 그 이별은 단순한 개인적 관계의 단절만을 뜻하지 않는다. 국가 폭력의 그림자, 질병의 고통, 죽음의 예감 그리고 삶 속에서 반복되는 소멸의 장면들이 겹겹이 얽혀 있으며, 시인은 이를 통해 "먼 곳"으로 밀려난 존재들의 운명과 내면을 응시한다.
시집의 첫 시편인 「언니, 딸기」에서 하두자는 월남전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소녀의 성장기를 교직한다. 딸기밭에서 자라나는 언니의 모습과 “딸기에서 폭탄 냄새가 났다”는 충격적인 이미지는 생명과 폭력, 성장과 파괴가 얽힌 시대적 상황을 선명히 드러낸다. 군인의 시선과 위협 속에서 춤추며 자라난 소녀들의 사랑과 희생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이의 복잡한 감정이 딸기라는 상징 속에 응축된다. 딸기를 먹을 때마다 폭탄 맛이 난다는 절묘한 역설은, 시대의 폭력이 개인의 일상과 내면에 스며드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다른 시편들에서도 고통의 서사는 이어진다. 「미열」에서는 병리학적 진단의 냉혹함과 그것을 견디는 존재의 상처를 흑백의 엑스레이 이미지 속에 담아낸다. 종양이라는 생물학적 질병조차 “나비 모양”으로 보는 시인의 시선은 고통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명과 존재의 형상을 찾아내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 나비는 “구원이 닿지 못한 흰나비”로 남으며, 삶의 끝에 닿아도 해소되지 않는 슬픔과 두려움이 여전히 어른거린다.
「폭설에 대한 감상」은 부러진 소나무 가지를 통해 아버지의 병실과 죽음의 기억을 겹쳐놓는다. 눈 덮인 정원과 아버지의 병상, 깨진 유리창 너머로 들여다보는 교실 풍경 등은 과거와 현재,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공간으로 펼쳐진다. 이 시에서 죽음은 폭설처럼 예기치 않게 들이닥치지만, 시인은 유리 파편을 치우듯 그 잔해 속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려 한다. 부러진 것은 소나무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는 자각은 남겨진 이의 애도와 슬픔을 절제된 언어로 전한다.
이 시집에서는 또한 죽음을 앞둔 이별의 시간과 애도의 정서가 여러 시에서 반복된다. 「엎드리다」에서는 요양원의 쓸쓸한 풍경 속에서 죽음이 조용히 자리를 옮긴다. 청운 요양원이라는 공간은 푸른 희망이 아닌 암묵적인 블랙홀로 변모하며, 남겨진 이는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준비를 하고 있는” 노인의 꿈을 바라보며 또다시 엎드린다. 죽음은 소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조용히 일상의 한켠에서 스며든다.
이와 같이 하두자의 시집은 삶의 고통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이를 과장하거나 감상적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사건의 표피를 벗겨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잔잔한 심연을 드러낸다. 「상상 이별」과 「말 줄임표」 같은 시편에서는 관계의 소멸과 배신, 끝내 채워지지 않는 정서적 공허를 유리잔, 오르골, 눈발 등의 이미지로 섬세하게 묘파한다. 관계의 단절 속에서도 끝내 남는 것은 “말 줄임표”처럼 명확히 규정되지 않는 여운이며, 이는 하두자의 시적 태도 자체를 상징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하두자의 『이별 뒤에 먼 곳이 생겼다』는 한 사람의 기억 속에 파묻힌 여러 이별의 얼굴들을 불러낸다. 사회적 폭력과 병, 죽음과 고독 그리고 사랑과 상실이 얽혀 있는 이 시집은 삶의 부유물처럼 남겨진 슬픔들을 서늘한 시선으로 응시한다. 그 속에서도 시인은 끝내 “엎드린다”.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에서 삶의 진실을 받아들이려는 시인의 윤리적 선택처럼 보인다. 삶은 결국 이별을 품고 먼 곳으로 떠나는 여정이다. 하두자는 그 여정을 조용히, 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