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도시’부터 ‘내 손안’까지
작품이 놓이는 풍경마다의 고유한 이야기
예술가들은 보이지 않는 심연의 것들, 풀리지 않는 미지의 세계에 대해 자기만의 언어로 답을 찾는다. 우리는 그들이 구현한 예술 작품을 통해 삶의 불확실성과 모호함에 대한 힌트를 얻거나 지루한 일상을 잠시 환기하거나 세상의 이치를 깨닫기도 한다. 여기서 예술가의 답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작품이 전시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장소와 시간이 다르면 그에 대한 답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국내 3대 메이저 화랑인 국제갤러리 이사로 재직 중인 저자 윤혜정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행위가 우리를 변화의 순간으로 안내”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예상할 수 없는 짜릿한 화학작용을 잊지 못해” 전시장을 어슬렁거린다. 저자에게 ‘예술을 경험한다’는 것은 단순히 보고 읽고 아는 것을 넘어 인간과 세상을 헤아려 보고자 하는 노력이다.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흔들리는 삶에 닻을 내려 준 그동안의 예술 경험, 즉 저자로부터 멀고 거대한 공간인 ‘세계 도시’부터 아주 가깝고 작은 ‘내 손안’까지 시공간적으로 종횡무진하며 예술 작품이 놓이는 풍경마다의 고유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굳이 움직이지 않고도 스마트폰으로 많은 것들을 소화할 수 있는 오늘날에도, 굳이 움직여야만 그 본질에 가 닿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예술도 그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앞에서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며 한 번의 터치로 순간을 박제해 버린 뒤 사진첩의 수많은 이미지 중 하나로 예술 작품을 소비하기도 한다. 저자의 이번 책은 너무 일상화되어 버린 ‘쉬운 길’ 대신 조금 멀더라도, 조금 오래 걸리더라도 “느리게, 천천히, 하나씩 꺼내어 읽”는 길로 가 볼 것을 독자에게 권한다.
공간, 인물, 작품을 관통해 빚어낸 인생의 유일무이한 순간
책에는 저자 자신의 일터뿐만 아니라 한국의 유수 미술관과 도서관,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아르헨티나, 덴마크, 일본 등 세계 곳곳의 물리적 공간이 경계 없이 흐른다. 창작자, 기획자, 컬렉터 등 예술 관련 인물과 그들의 궤적이 그 공간들을 관통하고, 저자 윤혜정은 그 모든 걸 촘촘히 엮어 자신만의 감상과 사유를 더해 유일무이한 인생의 한 조각으로 빚어낸다.
예를 들어 베니스비엔날레나에 갈 때마다 전시를 모조리 봐야 한다는 강박에 더해 혹시 놓치는 전시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시달린 그녀가 뜻밖의 전시장에서 ‘해방의 자유와 깨달음’을 맛본다거나, 베를린 신국립미술관에서 제왕적 미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와 사라진 예술가 테칭 시에의 극적 대비가 돋보이는 ‘인생 전시’를 만난다거나, 일본 나오시마 마타베에서 양혜규의 낮 전시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밤 전시를 통해 ‘아름다운 공생’에 대해 새롭게 곱씹어 보는 식이다.
또한 구순의 나이에 약 2만 킬로미터를 이동,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주로 스튜디오를 옮겨 작업을 이어 가는 김윤신 작가로부터 ‘삶과 일의 이상적 관계’를 고찰한다거나, 한국 작가의 작품을 수집하는 덴마크와 미국 컬렉터들의 집에서 ‘소유하는 사랑의 실체’를 대면한다거나, 일터에서 추상적인 작품을 전시하고 이를 일상 언어로 전달하는 ‘일에 대한 어려움’을 밝힌다거나, 손안의 책을 통해 예술계 뒤편에서 ‘보이지 않게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려 내기도 한다.
누군가가 살뜰히 기억해 주는 한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번 책에는 저자가 직접 찍은 사진들을 중심으로 약 130점의 컬러 도판이 함께 실린다. 윤혜정의 시선에서 촬영된 사진은 마치 그녀와 함께 예술 기행을 떠난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혼자라면 가지 않았을 베니스비엔날레의 체르토사섬, 혼자라면 느끼지 못했을 마르틴 그로피우스 바우 미술관의 황홀함, 혼자라면 알지 못했을 디종 콩소르시옴이라는 공간 등 이 책에는 누구보다 예술에 온 마음을 쓰고, 그것을 나누는 일에 열정을 다하는 윤혜정 덕분에 발견하게 되는 뜻밖의 예술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탄생에는 반드시 소멸이 뒤따른다. 사람도 그러하고 자연의 많은 것들도 그러하지만, 저자는 이번 책에서 “누군가가 살뜰히 기억해 주는 한 그 무엇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어떤 예술은 사라지지 않은 채로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 앞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