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땀이 눈에 들어갈 때
바람과 폭우가 범람할 때
내 몸이 뜨겁거나 바다가 뜨겁거나
모든 것이 고요하기를
소금기가 서려 있는 작업복을
벽에 박힌 못에 걸어두었다
_「집착의 주기」 부분
예로 든 이 시는 “삼 년 주기로 엉덩이에 찾아오는 것”에 대한 마음과 기분에 대한 작품인데, 사실 누군들 그 ‘작은’ 아픔이 반가울까. 그래서 시인은 “다시 오지 않기를” 빌지만 결국 온 것은 그 끝을 봐야 한다. 그리고 그 끝에 서서 “내 몸이 온전한 바다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소금기가 서려 있는 작업복을/ 벽에 박힌 못에 걸어” 둘 뿐이다. 김영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살면서 겪게 되는 일을 지난 다음에 무심(無心)에 다다르곤 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바람과 폭우”를 군말 없이 치르고 맞는 “고요”이다. 이런 인식은 여러 시편에서 드러난다. 「메두사」를 읽어도 그렇다. “정원에 있는 것들을 모조리 잘라버렸으나/ 비가 지나간 뒤 다시 무성해졌다” 같은 진술이나 “몸통을 보려면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격렬하지만 잔잔한 읊조림은 시인의 내면이 궁극적인 세계에 열려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즉 “아프도록/ 두드려서/ 말 한 마디 툭 던지듯이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두통」).
두통이 날아오르는 새 한 마리라는 비유는 두통에 대한 활기찬 감각적 표현으로도 읽히기도 하지만 두통에서 해방된 이미지로도 느껴진다. 삶의 감각을 추상적이지만 절대 공허하지 않은 이미지로 변환시키는 것은 이번에 김영서의 시가 도달한 지평이기도 한데, 사실 시의 광휘는 이 순간에 출현하는 법이다. 「별」이라는 작품을 봐도 그렇다. 주름이 늘고 “온몸 여기저기 검은 점이 박혀 있”는데 그 점을 “별”이라고 부르고 말면 상투성에 떨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김영서 시인은 “바탕이 밝아서 검은 별이 되었다”고 하거니와 즉 이 시에서 진짜는 “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1연에서는 “주름”, 2연에서는 “헐렁한 자루”, 그리고 3연에서는 “멍석”이 “별”의 바탕으로 등장한다. 다시 말하면 시인이 진짜 말하고자 한 것은 “별”보다는 이것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전체 작품을 배경으로 혹은 여러 시편들을 맥락화하면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
고통을 해학으로 살기
여기까지만 읽어도 김영서 시인의 시가 얼마나 몸에 충실한지 알 수 있지만 4부에 실린 시들은 몸에 대한 해학까지 보여주고 있어 눈길을 끈다. 단지 웃음으로 힘듦을 살자는 다짐이나 의지가 아니라 그냥 삶 자체가 해학이며 우주 만물의 운행도 그런 것이다.
감기라고 말하기는 쉬운데
치매라고 고백한 사람은 보지 못했다
감당 못 할 손님이 찾아오면 어쩌나
화투를 하다가 또 싸움이 시작됐다
백 년 전 비밀이 누설되기 직전이다
_「손님맞이」 부분
신발에서 말이 새어 나왔다
발자국마다 웃는 얼굴이 찍혀 나왔다
집 앞까지 따라올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발이 퉁퉁 불어 있다
선풍기 바람에 간지러운 발가락을 말리고 있다
낱말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_「수다를 만나다」 부분
「손님맞이」에서는 “예고 없이 손님이” 찾아오는 우리 몸의 사태에 대한 시인의 진술이 인상적이다. 그 “손님”의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그들에게는 어차피 내가 떠돌이”이기 때문이다. 이 “손님”의 정체는 몸으로 들어와 봐야 판명난다. 감기도 손님이고 치매도 손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확실히 치매가 “감당 못 할 손님”이긴 하다. 그래서 그 “손님”이 감기인지 치매인지에 대해 “화투를 하다가 또 싸움이 시작”되고 말았다. 여기까지는 소극도 비극도 아니다. 그런데 돌연 마지막 연에서 “백 년 전 비밀이 누설되기 직전이다”고 말하면서 시는 웃음으로 끝나지만 동시에 웃음에만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자신들도 모르는 삶의 비의를 넌지시 내보인다. “백 년 전 비밀”은 안다고도 모른다고 하기 애매한 것이기에 누설되면 안 되는 것이다. 누설되지 않아야 할 것이 누설되지 않아야 삶의 비의가 보존되는 법이며 그래야 삶은 지속될 수 있다.
「수다를 만나다」에서 “빗줄기 사이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웃는 얼굴이 “발자국마다” 찍혀 나올 때, 삶은 궁극적으로 웃음이 된다. 하지만 헤프고, 맥없고, 뜻 없는 웃음이 아니다. 삶의 발자국을 쉼 없이 놀려야 만들어지는 웃음이다. 대신 “발은 퉁퉁 불어 있”기 마련이다. 김영서 시인이 여기까지 썼으면 삶은 웃음이 아니라 슬픔이 되고 말지만 마지막 두 행을 더 추가함으로써 중력의 무게에 주눅 들지 않는 삶을 노래하고 말았다. “선풍기 바람에 간지러운 발가락을 말리고 있다/ 낱말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표제작인 「땀이 눈물보다 짜서」에서도 “눈물로 쓸어낼 수 없는 큰 슬픔”을 말하지만, 결국 그것들은 “너른 벌판에 옹달샘”일 뿐이다. 그래서 “땀이 범람하면 눈이” 감기지만 그것은 어차피 “맑음을 유지하는 방법”, 한 방편인 것이다. 김영서 시인에게 삶의 고통은 냇물을 건너는 징검돌이다.
이번 시집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그동안의 시집에서 시인은 자문을 이어왔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갈 것이다. 삶의 두께는 더 켜켜이 쌓이고, 주름은 더 늘어가고, 그만큼 질문도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제는 더 이상 질문을 멈추고, 허공에서, 빈 집에서, 텅 빈 동굴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통찰’이라고 한다면, 이미 이 세계에 내던져진 몸으로서 존재하는 시인은, 시인만의 삶의 형식을 만들어 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지금쯤 시인의 몸은 36.5도를 유지하면서, 잔잔한 몸의 소리를 듣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소리가 음악이 되고 시가 되고 그림이 된다면, 섣불리 게을러지고 섣불리 대충 살아도 좋을 것 같다.(최지온의 해설, 「몸 소리에 귀 기울여보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