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과 한(恨)의 멍에를 지는 지극한 삶
소탈한 현실의 언어로 묻는 사람다움의 의미
“하늘에는 흠뻑 뿌려진 수억의 별들이 서로서로의 거리를 지닌 채 부산히 반짝이고 있다. 그 서로의 거리가 어쩐지 절대적인 존엄성을 지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어느 별이 하나 타서 죽어버린다 하더라도 그들은 모른 체하고 여전히 더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못할, 그 마련된 거리에서 저마다 혼자서 반짝일 것이다.”
-「별빛 속의 계절」에서
소설가 한말숙이 문학계에 발을 들인 첫 기억은 피난 시절인 1950년대 초, 언니 한무숙을 따라 부산 광복동의 ‘금강다방’에 나간 것이었다. 당시 문인들의 집이자 사무실이자 연락처 노릇을 하던 그곳에서 차 한 잔을 시켜놓고 종일 앉아 있는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모습은 그에게 깊은 영감이었다. 그곳에서 “문단의 대가”로 불리던 김동리를 접하는 것으로도 그에겐 소설 한두 편이 뚝딱 구상되었다. 당연하게도 그의 초기 소설은 그가 처한 시대, 즉 한국전쟁 당시와 직후를 배경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십대 초의 파릇파릇한 대학생이던 그에게 전쟁은 살면서 겪은 가장 큰 충격과 고난이었다. 눈으로 피부로 그 아수라장을 겪고서도 탈속적 언어와 관념으로 삶에서 비켜난 문학을 하는 건 그의 성정과도, 그의 삶과도 맞지 않았다. 본 것을 본 대로, 있는 것을 있는 대로 그리기. 그것은 소박한 일상의 언어와 경험만으로도 이룰 수 있는 위업이었다. 일부 평단은 그것을 실존주의라고 불렀다.
『신화의 단애』는 현실에서 건져 올린 쉬운 언어로 크게는 시대, 작게는 주변 인간 관계의 울타리 안에서 지극한 삶을 영위하는 보통인의 이야기를 그려온 한말숙의 대표 단편들이다. 등단 시절부터 최근인 2024년까지 근 70년 세월을 망라하는 열여섯 편의 단편이 담겼다. 전후 미군 장교의 ‘뽀이’로 일하던 소년의 생활을 그린 첫 작품 「별빛 속의 계절」, 김동리의 추천을 받아 등단까지 이어준 「신화의 단애」, 장마철 어느 머슴 살던 부부의 죽을 고비를 통해 부부의 정과 에로스, 나아가 계급의 단면을 섬세히 보여주는 「장마」, 부모의 부재, 장례식의 소란 속에서 가족의 작지만 큰 행복을 돌아보는 「행복」, 전쟁이라는 역사적 경험으로 인한 세 남녀의 긴 오해와 화해를 그린 「상처」, 배우 윤정희를 주연으로 하여 영화로도 제작된 단편으로 기혼 여성의 고독감을 그린 「여수」, 서로 다른 국적의 두 남녀가 제3지대 일본에서 학회 일로 만나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내용의 「말 없는 남자」 등 그의 소설들은 드라마틱하지 않은 소재에 보편적 정서를 담아 최대의 공감을 끌어낸다.
10년 단위로 시대를 나눈 이 선집의 구성에서도 알 수 있듯, 한말숙의 소설들은 당대의 생활상에 깊게 발을 담구어 소재도 인물도 작가 자신의 생애 주기를 따른다는 특징을 띤다. 그러나 그런 변화의 와중에도 지극히 단순하고 일상적인 언어, 사람의 정 그리고 어느 삶에고 업보처럼 따라붙는 한의 정서는 이 소설가가 지키고자 하는 어떤 초심을 짐작케 해준다. 세월 속에서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대비를 볼 수 있다는 점도 『신화의 단애』가 선사하는 한 가지 재미가 될 것이다.
단편집 한 권, 장편 한 권, 수필집 한 권
70년 문학 여정의 결산과 정수(精隨)
“단편 총 60편 중에서 16편만 골라서 50년대, 60년대, 70년대…… 이렇게 몇 편씩을 10년 단위로 묶어보았다. 이런 식으로 해서 버리고 싶은 것을 다 버려 단편 선집 한 권으로 압축했고, 수필집도 한 권, 장편도 한 편만 남기기로 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소설가 한말숙은 자신의 글만큼이나 담백한 마무리를 원했다. 말년의 작품집은 으레 ‘집대성’의 형식을 취하기 마련이지만, 『신화의 단애』 구성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는 글을 아까워하는 편집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들어낼 소설의 제목을 매일같이 더해갔다. 60여 편이 단 열여섯 편으로 줄어든 만큼,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은 그가 어떤 소설가, 나아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길 원하는지를 짙게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보편적인 어휘로 가장 신비로운 세계를 표현한 한말숙 문학이다.
은행나무는 한말숙 문학선집 제2권 장편소설 『아름다운 영가』와 제3권 에세이 『새와 개와 사람과』도 곧 출간할 예정이다.
“파격적인 전후파 여성을 주인공으로 방황하는 세대의 혼란스러운 세태를 묘파했다. 50년대 소설인데도 문체가 간결하고 전개에 속도감이 있어서 현대적 감각의 소설로 읽힌다.” -이숭원(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