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멸하는 불빛처럼 반짝거리는 유행
그 안에 깃든 너와 나의 이야기
김나현, 「미스터 액괴 나랑 떨어지지 마」
사이가 소원해진 ‘나’와 ‘강우’는 3년째 동거 중인 커플이다. 어느 날, 두 사람 앞에 정체불명의 액괴가 나타난다. 위험한 생명체는 아니지만, 액괴가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나’는 집에서 강우를 보살피기로 한다. 액괴가 강우의 등 뒤에 붙었기 때문이다. 강우가 매일 등을 돌리고 잠드는 탓에 ‘나’는 액괴를 바라보며 잠들 수 있어 좋았지만, 문제는 액괴가 강우의 진심을 대신 뱉어내면서 시작된다. 강우를 힘들게 했던 상사에게, 어릴 적 강우를 괴롭혔던 친구에게, 심지어 강우의 첫사랑에게까지 액괴는 거침없이 솔직한 말을 쏟아낸다.
“싫어……요오…….”
강우의 등이 말했다. 뭐?
“진짜…… 싫다……. 돈 주기 싫어…….”
강우는 등을 돌렸다. 액괴가 초록빛을 내뿜으며 무섭게 보일 정도로 출렁거렸다. 강우가 고개를 돌린 채 변명하듯 말했다.
“내가 한 말 아니고, 이 녀석이 하는 거야.” (14쪽)
서이제, 「내가 사는 피부」
지리산에 나타난 침팬지 한 마리에 전국이 떠들썩하다. 서식지도 아닌 데다 정확히 어떤 종인지 확인도 안 되는 존재. 하지만 발견된 뒤 인간의 품에 안긴 그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가면서, 점차 그 존재의 인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각종 커뮤니티와 SNS에 침팬지의 사진이 도배된다. 이에 질세라 방송국에서도 침팬지를 프로그램 소재로 삼아 전국에 송출할 방송을 촬영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돌발 행동으로 침팬지가 위험에 처하게 되고, 우연히 지리산에서 한 남자가 사라지는데…….
깨어나라.
이제 그만 깨어나라.
하지만 끔찍하게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앞으로 나는 영원히 이 콘크리트 벽을 벗어나지 못하겠지. 그건 야외 방사장으로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68쪽)
황모과, 「오감 포워딩」
“가장 황홀한 기분을 느낄 때, 손바닥에 있는 버튼을 눌러요.” 지옥과 같은 집에서 벗어나 도착한 곳, ‘혜원’은 자신을 구해준 K사의 첫 번째 ‘오감 포워더’가 된다. 오감 포워더란, 자신의 인생에 있어 클라이맥스라 부를 만한 순간의 감정, 감각을 다른 이에게 양도하는 이들이다. 손바닥 안에 이식된 버튼을 누름으로써 말이다. 순간 정신을 잃는 것뿐 포워딩하는 것에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 혜원, 결국 뜻밖의 문제에 부딪히고 자신의 최고의 순간과 최악의 순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최고이자 최선의 순간을 누군가에게 양보하면 내겐 차선의 순간이 허락된다. 앞으로 내 인생에 클라이맥스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악이었던 지옥을 떠올리니 차선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91쪽)
김쿠만, 「벌룬 파이터」
‘북해’에서 날려 보낸 풍선에 사람이 매달려 날아온다. 이에 정부는 전 국민에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풍선을 주의하라’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벌룬 파이터’라 불리는 그들의 목표는 고층 건물의 꼭대기에 착륙하는 것. 왜 그들에게 파이터라는 이름이 붙었을까. “얼마 하지도 않은 싸구려 풍선과 연간 유지비가 천 달러 될까 말까 한 가난한 경보병”이 고층 건물 꼭대기에 매달려 수십억에 달하는 건물 매매가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이제 풍선에 매달려 온 애물단지였던 그들은 군사적으로 대응해야 할 국가적 사안으로 변모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중요한 건 결국 돈이기에.
하루 평균 천 개가 넘는 풍선이 그쪽 하늘에서 이쪽 하늘로 넘어왔고, 그 정도 양이라면 성인 남성 한 명을 허공에 띄울 수 있을 정도였지만, 사람을 수천 개의 풍선에 묶어 공중에 띄우는 건 픽사에서 오래전에 만든 애니메이션에서나 펼쳐질 법한 광경이었기에 아무도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이란 것은 헬륨 풍선처럼 허공을 향해 허황된 모습으로 떠오르기 마련이었다. (127~128쪽)
변미나, 「나무인간」
Y시의 한 공원에 한 여자가 발견된다. 웅크리고 누워 신음을 뱉던 한 여자의 몸이 나무껍질에 뒤덮여 있던 것. 소식은 일파만파 퍼지고 ‘나무인간증후군’이라는 병명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의료진은 전염성이 없는 병이라고 했지만 환자는 급속도로 증가하고, 원인과 해결책이 고안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후죽순으로 나무인간의 수는 늘어난다. 결국 Y시에서는 유수의 기업인 S그룹과 손을 잡고 치료제를 개발하는데, S그룹의 행보가 수상하다. 나무인간증후군의 근원은 무엇일까? 정말 이 병은 감염되는 걸까?
사람들은 여자에 관해 알려진 정보를 바탕으로, 그 여자가 왜 나무인간이 되었는지 가늠해보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들은 그 여자와 자신들의 공통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스스로 그 여자, 즉 나무인간이 될 가능성이 터무니없이 희박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이들은 “너 자꾸 그러면 커서 나무인간 된다”라는 말에 울며 떼쓰는 일을 멈추기도 했다. (172쪽)